중국의 정사 및 1차사료에 나타나는 조선의 중심지 찾기...

서기2014.3.16. 북경문물연구소는 북경에서 발굴된

낙랑군 조선현 사람인 한현도의 무덤(서기539년)을 공개했다.

중국은 다른 곳에서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러나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선(단군)의 강역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핵심근거 6. 고조선은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위치했다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기 위하여 강과 산과 더불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자연지형이 고조선의 해안선이다. 『산해경』에 의하면 고조선은 ‘(중국)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있었다고 한다. 관련 기록들을 참조하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였다.

 

핵심근거 7.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이다

강과 산 그리고 해안선 등의 자연지형을 제외한 인공구조물 중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알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지표가 진나라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기존의 진장성․조장성․연장성 등을 연결보수하여 완성한 장성이다. 고조선과 진나라는 만리장성의 동단을 경계로 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만리장성의 동단을 통하여 고조선의 강역을 살펴볼 수 있다.

진나라 만리장성은 『사기』․『진서』‧『태강지리지』‧『통전』‧『무경총요』등을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만리장성 동단의 위치를 ‘요동’, ‘갈석산’, ‘수성현’, ‘바다’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요동에 갈석산이 있고, 갈석산이 수성현에 있으며, 고대에는 수성현이 바다와 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표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곳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이다.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는 이곳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라는 수많은 기록과 더불어 장성 유적이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은 「중국역사지도집」에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 일대까지 왜곡하여 그리고 있다. 그 근거로 『태강지리지』‧『진서』‧『통전』에 나타난 장성 관련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기록들은 모두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한반도 평양 일대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라는 1차 사료는 전무하며, 장성 유적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까지 그리는 유일한 근거는 대한민국 강단사학계의 통설이 한나라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으로 잘못 비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단사학계의 잘못된 통설이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근거를 제공하여 나라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통감하고, 하루빨리 식민․노예사관을 청산하고 민족․자주사관을 정립해야 한다.

 

▲ 서기2014.3.16. 북경문물연구소는 북경에서 서기539년으로 편년되는 묘를 발굴했다. 그런데 이 묘의 주인이 낙랑군 조선현의 한현도韓顯度라는 사람으로 밝혀졌다.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위 사진은 한현도의 무덤.

핵심근거 8.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滿城 일대이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료가 『사기』「조선열전」이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과 한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는데, 한사군 전쟁이라고 부르는 조朝‧한漢 전쟁이다.

한 무제는 6만이 넘는 대규모 수륙양군을 파견하여 고조선을 공격하였으며, 고조선은 수도 왕검성을 배경으로 1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유리한 수성전을 펼쳤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고조선 내부에서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주화파의 장군과 대신들이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함으로써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평정하고 낙랑군‧현토군‧진번군‧임둔군 등의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이 조‧한 전쟁의 전모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바로 『사기』「조선열전」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조‧한 전쟁 당시 한나라의 사관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한 전쟁의 전모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사기』「조선열전」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생생한 1차 기록이다.

『사기』「조선열전」에는 왕검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여러 사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설을 토대로 왕검성의 위치를 찾아보면,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위치하였음을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또 『산해경』과 『회남자』의 조선 관련 기록을 종합하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바다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에 위치하였으며,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滿城 일대였다.

 

핵심근거 9. 신라인들은 낙랑 사람으로 하북성 보정시에서 망명하였다

중국 정사인 『삼국지』는 신라를 건설하였던 진한 사람들은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떠나온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아잔’이라 불렀는데, 낙랑인들을 ‘아잔’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즉 진한 사람들은 진秦나라 망명인으로 ‘낙랑’이 고향이었다. 또 『삼국사기』는 ‘조선의 유민들이 진한 6부를 건설하였다’고 하였다. 이들 기록을 통하여 신라를 건설하였던 진한 사람들의 고향은 ‘낙랑’ 또는 ‘조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삼국유사』에 기록된 최치원의 말에 의하면 진한의 유민들은 연나라의 탁수가 흐르는 지역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나라의 탁수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흐르는 거마하이다.

『삼국지』․『삼국사기』․『삼국유사』등의 진한 관련기록들을 종합하면 신라인들의 고향은 하북성 보정시 일대로 그곳이 고조선의 중심지이며,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핵심근거 10. 고조선의 준왕은 하북성 보정시의 왕검성에서 망명하였다

고조선 준왕의 망명과 관련하여 왕검성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는 최고의 사료는 왕부의 『잠부론』이다. 준왕의 망명사건은 『후한서』․『위략』․『삼국지』등 여러 사서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이들 사서들은 모두 준왕의 망명사실과 망명하여 도착한 곳에 대한 정보만 있을 뿐, 준왕이 떠난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므로 준왕의 망명사건과 관련하여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사료는 현재로서는 왕부의 『잠부론』이 유일하다.

『잠부론』에 따르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한성韓城의 서쪽에 있었다. 한성韓城은 현 중국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에 위치하였으므로, 그 서쪽으로는 거마하가 흐르는 하북성 보정시가 위치하며, 더 서쪽으로 나아가면 험준한 태행산맥이 나오고 그 너머로는 전통적으로 연나라 땅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잠부론』에 의하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할 수 있는 곳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밖에 없다.

글: 김봉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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