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의 기사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에서 벌어진 일...

 

고대판 조선총독부, 임나일본부설은 살아있다(6).

 

백제장군이 임나를 지배했다고 하여 '임나백제부설'을 주장하는 김현구씨...

그러나 그 내막은 '임나일본부설'임이 밝혀져...

목씨가 백제인이라고 하면서 나중에 목만치가 일본으로 가서 왜인으로

변했다는 김현구씨...

국적이 왜인인 목씨가 임나를 지배했다면,

이는 임나일본부설에 지나지 않아...

 

 

『일본서기』에 인용한 『백제기』에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신라 여인을 얻어 목만치를 낳았다고 함은, 문맥상으로 위에 본 진구 49년(369)의 신라 정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김현구는 엉뚱하게 『3국사기』의 403년 ‘신라 변경을 쳤다’는 기사를 들먹이며 이때 목라근자가 신라를 쳤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왜 하필 목라근자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목만치의 출생을 늦추어 그의 나이를 475년에 70세 정도의 호위대장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임나를 지배한 목라는자, 그의 아들 목만치는 왜인이라는 김현구씨...

‘신라 변경을 쳤다’는 이 짥막한 기사는 구체적인 정보를 거의 전해주지 않는 사소한 사건이다. 이를 목라근자가 했다고 믿게 하려면 다른 무슨 정황증거라도 대야 할 것이 아닌가? 필자가 추리한다면 목라근자가 백제에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가 이 사소한 사건의 주역일 수는 없다. 그는 이전에 신라를 격파한 후 광대한 임나제국을 모두 평정한 백제의 으뜸가는 장수가 아닌가? 『일본서기』만 믿고 『3국사기』는 잘 알지도 못한다는 김현구가 ‘왜’를 ‘백제’로 무리하게 바꾸려다 보니, 『3국사기』를 가지고 이런 비논리적이며 비학자적인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백 보 또 양보해서 그가 70세의 백제의 호위대장이었다 하더라도 그후 그가 도일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김현구는 이렇게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일본서기』와 『백제기』가 다 같이 그가 한반도에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전하고 있고, 『일본서기』가 그 아버지 목라근자를 ‘백제장’이라고 명기하면서도 그를 ‘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목만치가 도일하여 왜인이 되었음을 잘 말해준다.”(같은 책, 119~120쪽)

『일본서기』와 『백제기』에는 위에서 본 대로 414년에 그를 일본으로 소환했다고 했을 뿐, 김현구의 주장대로 475년 이후 그가 일본으로 왔다는 기록은 없다. 이렇게 사료에 없는 이야기까지 자기의 잘못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은 속임수와 같다. 또 목라근자를 ‘왜인’으로 인식한 것은 그가 이미 귀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 아들 목만치도 당연히 왜인인 것이지, 목만치가 475년 이후에 도일하여 왜인이 된 것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김현구 자신의 주장대로 목만치가 ‘왜인’이 되었다면 목만치에 의한 임나지배는 왜에 의한 지배이지 백제에 의한 지배가 될 수 없다. 김현구의 백제에 의한 임나지배라는 것이 허설임이 스스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 일본 나라현에 있는 소아씨의 비고신사. 비조사(아스카테라)는 일본 최초의 거대불교사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아씨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소아씨가는 야마토왜정권을 서기6세기, 100여년간 좌지우지하면서 당시 일본의 실권자로 군립했다. 이 소아씨는 백제의 목씨인 목만치가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생긴 목씨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김현구씨는 이 목씨일족이 왜인으로 귀화하여 당시 일본 야마토왜정권을 장악한채로 임나를 지배했다고 했다. 결국 야마토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해서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식민통치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도 김현구씨는 임나일본부설을 긍정한 적이 없다고 한다.

김현구는 목만치 이후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 관련 인물들도 모두 목씨의 후예라 하여 왜인이 아닌 백제의 관리로 둔갑시켜, 487년 임나에서 반란을 일으킨 기노오히하스쿠네를 목군유비기라 하고, 529년 임나부흥회의를 주관한 오미노케나노미를 목군윤귀, 그리고 562년 임나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기노오노마로스쿠네 역시 목씨였다고 추정했다. 그가 기노오히하스쿠네와 기노오노마로스쿠네를 목씨로 보는 근거는 이렇다.

“기(紀)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목(木)으로도 표현되어 있다. 일본 음으로는 기(紀)나 목(木)은 같은 ‘기’ 음인 것이다. ··· 기씨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씨족이 맞다면 기씨의 한반도에서의 성씨는 목씨였으며 도일하기 전 한반도에서는 목씨 일족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같은 책 125쪽)

 

왜인으로 귀화한 목씨일족이 임나를 경영했다면,

이는 임나일본부설임...

김현구의 추정이 설사 맞다고 치더라도 『일본서기』의 문맥상 목라근자나 목만치가 이미 왜에 귀화한 왜인이었으므로 그 후손들도 왜식 이름으로 바꿨을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이미 왜인이지 백제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현구의 주장대로 그들이 행위 당시 백제인이었다면 임나와 관련된 후에는 왜 모두 왜로 귀화하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것인가? 이는 김현구의 희망사항이지 그러한 기록이나 근거가 없지 않은가?

한편 임나 경영과 관련하여 김현구는 왜계(倭系) 백제관료들도 있었다고 이렇게 말했다.

“백제에서 활약한 왜계 백제관료들은 원래 한반도 출신인 일본 호족의 자제로 주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백제의 지방장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 지방장관으로는 차리(영산강 동안)의 지방장관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 동방(충남 은진)의 영(領) 모노노베노 마가무노무라지, 임나 지역에서 활약하던 고세노오미 · 기비노오미 등이 있다. 이들은 백제 지방장관으로서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왜병들을 지휘하기도 했다.”(같은 책, 192쪽)

김현구는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 등 4인의 백제 지방장관을 예로 들면서 이들을 왜계 백제관료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허위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왜인들을 근거도 없이 왜계 백제관료라고 멋대로 국적을 바꿔버린 것이니, 학자라면 이럴 수는 없다.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의 경우 게이타이(繼體) 7년(513) 조에 ‘위(委:왜)의 오시야마키미’라고 하여 왜의 출신임을 밝히고 있지 백제계 운운하는 말은 없다.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백제관료가 아니라는 사실은 게이타이 6년(512) 조를 보아도 분명해 진다. 그의 직위가 차리의 국수(國守)로서 이는 일본의 관직명인데, 김현구는 이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백제의 지방장관이라고 설명했다. 호즈미노오미는 또 왜왕에게 임나 4현을 백제에 주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이는 그가 일왕으로부터 임나의 국수로 임명받은 신하로서 왕에게 건의했음을 알게 한다. 만약 그가 백제의 지방장관으로서 임나를 다스렸다면 이미 백제가 다스리는 4현을 백제에게 달라는 것이니 이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짓을 말하려면 좀 더 치밀하게 해야할 것이거늘 이렇게 뻔한 거짓을 행한다는 것은 다른 학자들이나 독자들을 너무나 경시하는 오만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차리가 영산강 동안 지역이며 동방이 충남 은진이라는 김현구의 잘못된 인식은 여기서 새삼 지적하지 않겠다.

 

<일본서기>를 일본열도에 적용하면 맞아 떨어지는 부분 많아...

여기서 『일본서기』의 임나와 3국 특히 백제에 관한 기록들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일처럼 해석했다는 점은 잠시 접어두자. 『일본서기』를 보면 임나·백제 관계 기사가 흘러넘칠 정도인데다가 거의 모든 기사가 너무나 세밀하여 『3국사기』의 간략한 서술방식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비록 『일본서기』의 진구왕후까지의 기록은 허구이고 그후 오진왕부터도 개변·윤색 등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임나나 백제에 관한 그 수많은 내용을 몽땅 부정하는 것은 학구적 태도가 아닐 것이다.

필자의 좁은 견해로는 그 내용의 대부분이 한반도가 아니라 열도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다만 근세의 일인들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그 기록들을 한반도에서의 일로 만들기 위해 『일본서기』의 기록을 변조하고 그 해석이나 연구를 비학문적인 방법으로 한 것으로 본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백제왕에 관한 기록인데, 열도의 백제에 관한 일을 한반도 백제왕의 이름으로 써서 혼동하게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7부에서 계속).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