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망한 백제인들이 열도로 쫓겨가서 쓴 <일본서기>어디까지 믿을 수 있나...

 

'고대판 조선총독부, 임나일본부설은 살아있다(5)'

 

김현구씨, '임나일본부설' 교묘하게 퍼뜨려...

심지어 사료조작까지 하면서 임나가 가야라고 해...

 

임나일본부에 관한 김현구 논리의 핵심은 스에마쓰나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왜가 임나를 경영했다는 주장을 백제가 임나를 경영했다는 주장으로 바꾼 것이다. 이 주장 역시 『3국사기』를 토대로 검증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일본서기』만을 토대로 한 것이기에 옳은 주장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더구나 『일본서기』의 임나 관련 기록들을 검토함에 있어서도 무리하게 그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꾸려다 보니 많은 억측과 사료의 조작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아래에서 그의 잘못된 논리를 상세히 비판하겠다.

우선 앞에서 본 대로 진구왕후의 임나 평정은 가공의 기록이다. 그런데도 이 기록에 나오는 4명의 주요 장군들 중 백제 장군 목라근자만 실제 인물로 추정하고 그의 임나 평정을 역사적 사실로 취급한다. 관련 기록인 『일본서기』 진구 49년 3월 조를 보자.

“아라타와케(荒田別)·가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사사노궤(沙沙奴궤)[이 두 사람의 성은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했다. 그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 또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 4읍이 스스로 항복했다. 이에 백제왕 부자와 아라타와케·가가와케 등은 함께 의류촌에 모였다.”

만약 이 기록을 사실로 본다면 정벌의 주체는 아라타와케·가가와케이며 목라근자·사사노궤는 지원군이다. 그러므로 백제왕 부자와 만났을 때도 아라타와케·가가와케 등이라고 하여 목라근자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야마토 왜에서 왜군을 보내 임나를 정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백제 장군 목라근자가 지원군으로 참여한 것도 백제왕의 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왜왕의 명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목라근자를 백제 장군이라 주석한 것은 그의 출신을 말한 것으로 왜에 귀화한 인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김현구씨, 가장 믿을 수 없는 조항으로 알려진 <일본서기>신공황후조를

아무런 의심없이 기정 사실로 전제하고 이야기 전개...

김현구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목라근자가 백제 장군이라 한 부분만 보고 그가 백제왕의 명을 받아 지원군으로 가담한 것으로 해석했으나, 이는 자기의 추리일 뿐이다. 그는 또 다른 왜의 장군들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하였으나 아라타와케의 경우 『일본서기』 오진(應神) 15년(404) 조에 모야군(毛野君) 집안의 시조라고 명기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굳이 한 집안의 시조를 가공의 인물이라면 유독 목라근자만 실제의 인물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한다는 말인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료의 해석을 멋대로 하는 것은 학지라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임나는 한반도에 없었고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가 주도하여 임나를 평정한 것도 아니지만, 백 보 양보하여 김현구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백제가 임나(즉 가야)를 평정했다면 후일 신라가 실제로 가야를 평정하고 군현으로 편입시켰듯이 백제도 그렇게 하고 지방관들을 임명해 다스리면 된다. 복잡하게 ‘임나ㅇㅇ부’같은 이상한 조직을 두어 다스릴 필요가 없다. 더구나 백제만큼 넓다는 임나를 어렵사리 평정해 놓고 그 경영을 평정한 장군에게 맡기고 또 그 아들 목만치(木滿致)와 목씨 일가에게 대대로 전하게 했다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된다. 백제왕이 대등한 세력을 가진 임나왕을 따로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왜 백제에서 해야 하는가? 결과가 이렇다면 상식적으로 애초에 정벌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 하야시 다이스께(林泰輔)의 <조선사>의 일부분. 이 책은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식민사관의 교범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역사를 통사형식으로 그려 놓고 있는데 철저하게 외세에 종속된 한국사를 설정해 놓고 있다. 북쪽은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 한사군으로 시작했고,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면서 임나=가야에 일본부가 설치되어 고대에 일본이 이곳을 식민통치했다고 기술 하고 있다.

 

목라근자의 아들이라는 목만치에 대해 보면 오진(應神) 25년(414) 조에 이렇게 기록했다.

 

“백제 직지왕이 죽었다. 이에 아들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대왜(大倭)의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소환하였다.’고 한다.].”

 

백제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했다고 하였으나 『3국사기』에는 그 해가 420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은 6년의 오차가 있다. 그리고 목만치에 대해서는 『3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위 기록은 한반도에 관한 것이 아니고 왜열도의 백제·신라와 임나에 관한 것으로 보겠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는 왜에 살던 백제인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한반도 백제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당연히 『3국사기』「백제본기」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목만치에 대해 김현구는 이렇게 주장했다.

“한편 그 아들 목만치는 『3국사기』 475년 기록에서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문주왕을 따라 공주로 남천하는 백제에 실재했던 인물로 확인된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48~49쪽)

목만치가 『3국사기』에 보이는 실제 인물이라고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평소 『3국사기』를 사료 취급도 하지 않는 김현구가 정 다급하면 『3국사기』에 기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3국사기』에는 ‘목만치’는 없고 ‘목협만치(木協滿致)’라고 나온다. 그런데 위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목라근자가 신라정벌 때(369) 얻은 신라부인에게 낳은 목만치는 475년에 백 세가 넘는 나이다. 이 때 목만치가 생존해 있었다 치더라도, 그가 문주왕(당시 개로왕의 태자)을 호위하여 도망하는 중책을 맡았던 목협만치로 볼 수 있을까? 또 위 『일본서기』에는 414년에 목만치를 왜로 소환했다는데 그후 다시 백제에 가 장군 노릇을 했다는 기록은 『3국사기』에도 『일본서기』에도 없다. 『일본서기』에 대왜(大倭) 목만치라고 기록했듯이 목만치는 백제에서 왜에 귀화한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였다는 것이며, 그들과 관련된 백제·임나는 왜열도의 작은 나라들이었다.

 

서로 다른 인물을 같은 인물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김현구씨...

106세나 되는 목만치의 나이가 문제가 되므로 김현구는 또 한 번 『3국사기』에 기대어 곤경을 벗어나려고 이렇게 주장한다.

“『일본서기』에서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라고 씌어 있다. 『3국사기』에 의하면 목라근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369년부터 그 아들 목만치가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475년 사이에 백제가 신라와 싸운 것은 403년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가 유일하다. 403년을 전후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투가 있었음은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백제기』의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신라 여자를 취해서 얻은 아들’이라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목라근자가 목만치를 얻은 것은 403년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18~119쪽) (6부에서 이어짐)

글: 황순종(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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