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를 믿지 않는다면서, 필요할 때는 잔뜩 끌어다 쓰는 김현구씨...

 

<일본서기>가 문제가 많다면서 <일본서기> 맹종하는 김현구씨...

학자이기를 포기한 듯 한 발언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혼돈과 모순 그리고 부패는

일제식민지배의 후유증... 그 정점에 식민사관이 있다.

 

김현구는 3국과 일본의 관계를 연구한다면서 『일본서기』만 맹신하여 『3국사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일본 유학 시 박사학위 논문을 「야마토 정권의 대외관계」라고 하여 한·일관계를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일본의 입장에서 보았으며, 본인 스스로 법정에서 『3국사기』는 잘 모른다고 당당히 실토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단편적이나마『일본서기』의 황당한 조작 기사를 보았으나 실제로는 진구왕후 때까지의 모든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거의 공인된 정설이다. 이것은 필자의 과장이 결코 아니며 김현구 자신도 이와 같은 취지로 이렇게 말했다.

“『일본서기』의 한반도 관계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반하거나 상호간에 모순되는 부분이 대단히 많아 일본에서도 그 사료비판 능력에 따라 학자의 레벨이 결정된다고 일컬어질 만큼 많은 문제점을 지닌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31쪽)

이처럼 문제가 많은 『일본서기』를 사료로 쓸 경우 심사숙고해야 함은 상식이며『3국사기』 등 다른 사료를 통한 교차검증은 불가결하지만, 『삼국사기』를 모르는 김현구는 『일본서기』만 내세우니 자신의 사료비판 능력을 어느 레벨로 봐야 할지 지극히 의문이다.

김현구는 임나 문제의 근거로 『일본서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이렇게 말한다.

 

억설을 펼치기 위해 객관성과 기본을 무시하는 김현구씨...

“6세기의 한일관계를 보여주는 기본 사료로서는 한국 측의 『3국사기』와 일본 측의 『일본서기』를 들 수 있다. 그런데 『3국사기』에는 6세기의 한일관계에 대한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한일관계에 대한 기사가 6세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6세기의 한일 관계는 좋든 싫든 전적으로 『일본서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또 복잡하게 다른 사료를 고려할 필요가 없으므로 연구방법도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한일교섭사의 제 문제』, 21쪽)

임나일본부설 등 6세기의 한일관계는 일본 측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지만 이는 거짓이고 속임수다. 『삼국사기』에는 5세기까지 왜적이 신라에 끊임없이 들어와 노략질한 기사로 넘쳐난다. 특히 『일본서기』에 왜가 신라를 두 차례 정벌했다는 4세기에는 『삼국사기』에 그런 내용은 없고 왜국에서 두 차례 신라에 혼인 요청을 한 것과 신라에서 왜와 국교를 단절한 내용이 있는데도, 김현구는 『일본서기』의 일본에 의한 신라 및 임나 정벌만 믿는 사람이다. 6세기에 한일관계 기록이 없다는 것은 신라든 백제든 왜와 중요한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며, 일본 측 기록이 많다고 하나, 김현구 자신이 말한 대로 신빙성이 적은 『일본서기』는 원칙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특히 진구왕후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일본과 우리 학계의 정설인데 김현구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오늘 날 시각에서 본다면 논리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진구왕후의 3한정벌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는 학문적으로도 진구왕후의 3한정벌은 사이메이(齊明)왕이 663년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4백여 척의 배에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백촌강싸움에 파견한 사건을 모델로 하여 가공된 이야기라는 것이 통설이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39쪽)

▲ 서기1880년에 그려진 야마토 왜의 '신공황후'의 이른바 '삼한정벌도'. 그런데 그녀가 들고 있는 활을 보면 현재까지도 일본활로 활용되고 있는 긴 활이다. 이것으로 신공황후가 서기369년에 우리나라 남부를 침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신라는 낙랑단궁에서 보듯이 시위를 풀었을 때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띄는 당시 세계최강의 활을 갖고 있었다. 이 활을 각궁, 만궁, 복합궁이라고 한다. 편전을 이용하면 사거리가 4백미터에 육박하는 당시로써는 가공할 무기였다. 구한말 일본군이 갖고 있던 최신식 무라다 소총과 우리의 화승총과의 대결과 같은 것이었다. 개인병기면에서도 당시 왜는 상대가 안되었다. 그림 스스로가 신라와는 상대가 안되는 무기체계를 갖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김현구씨의 주장은 학문이라고 보기 어려워...

진구왕후가 후대 사이메이여왕을 모델로 한 가공의 인물이라면 원칙적으로 진구 조에 나오는 모든 기록은 부정되어야 마땅하다. 김현구 자신도 지적했듯이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들도 임나 7국 평정 등의 기사를 부정해 왔다(최재석, 『고대한일관계사연구』, 143쪽). 그러나 김현구는 부정되어야 할 임나 평정 기사를 토대로 임나일본부설을 논하고 있으니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그는 임나 평정시 참여한 아라타와케·가가와케·목라근자·사사노궤 등의 장군들 중 백제장군으로 기록된 목라근자만 실제의 인물이라며 나머지 왜의 장군들은 허구의 인물이라 해석하여, 임나평정이 목라근자 즉 백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자기의 필요에 따른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 허구의 진구시대에 기록된 내용을 전면 부정하지 않고 4명의 장군 중 1명만 실제의 역사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임나는 고고학적으로도 가야가 될 수없어...

지금까지『일본서기』의 허구성을 보았으나, 다음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임나가 과연 가야인가를 보기로 하겠다. 임나에 관한 식민사학의 모든 논의는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와 같은 나라라는 전제 아래 이루어져 왔으므로, 『일본서기』의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임나일본부설’은 허위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임나와 가야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먼저 앞선 연구자들의 결론을 먼저 소개하겠다.

고려대 최재석 명예교수는 고대 한일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한 석학인데,『고대한일관계사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역사조작에 방해가 되는 『3국사기』나 『3국유사』는 조작으로 몰고, 가야와 미마나(임나)가 동일 국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제시함이 없이 말로만 가야와 미마나는 동일 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가야와 미마나가 전혀 별개의 나라라는 증거는 있을지언정 같은 나라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임나=가야’라는 것은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한편 고고학자 안춘배 교수 역시 「고고학 상에서 본 임나일본부설」에서 ‘가야=임나’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이 일본 측에 의해서 정리된 고고자료만으로도 임나일본부설의 성립은 어려운 사실이고, 현재까지 자료로 볼 때 임나일본부설이란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한일 양국의 고고학자들은 모두 인식하고 있다. 결국 현 단계에서 임나일본부설이란 과거의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일본인들의 향수 속에 심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문헌사료만이 아니라 고고학 사료를 살펴봐도 ‘임나=가야’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군국주의자들의 정치 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한 것은 악랄한 식민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1949)인데, 그의 임나관 자체가 문헌사료는 물론 고고학적으로도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비학문적인 주장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구는 최재석 교수나 다른 학자들의 올바른 지적에 단 한 번도 대응한 적이 없으니, 이는 자신의 주장이 학문이 아니라 일방적 선언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4부에서 계속)?

글: 황순종(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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