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구씨, 임나일본부 내용 모두 긍정하면서 단지 주체만 백제라고 해...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조는 일본내에서도 허구로 인정...

그런데 김현구씨는 이를 모두 사실로 보고 단지,

일본이 아닌 백제가 지배한 것으로 둔갑...

 

 

이와 같이 『일본서기』의 임나를 포함한 신라·백제·고구려의 4국이 한반도의 4국과는 별개이므로, 한반도의 임나를 백제가 평정하여 경영했다는 김현구의 설이나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왜에 의한 남선(南鮮:남조선)경영론은 애초부터 성립의 여지가 없는 허구이며, 정치적 목적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있었다는 임나는 학문적으로 더 이상 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김현구가 평생을 임나일본부 문제에 매달려 진실을 왜곡하고 매국적인 주장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다른 여러 측면에서 위 『일본서기』 기사들의 허구성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 교차검증해도 임나일본부는 존재할 수 없어...

첫째, 진구왕후가 320년 신라·고구려·백제를 정벌했다는 이른바 3한 직할령에 관한 기록은 김현구의 표현대로 “진구왕후의 3한 정벌을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니, 『3국사기』에 이와 관련된 언급이 일체 없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더구나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여 3국을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니 식민사학자들까지도 차마 이를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왕후측의 출병규모나 함선의 수, 장군의 이름, 신라와의 구체적 전투장면 하나 없이 3국의 대왕들이 무릎을 꿇었다니 이것이 어찌 제대로 된 역사의 기술로 볼 수 있겠는가?

둘째, 진구왕후가 369년 신라를 격파하고 임나를 평정했다는 기록도 허황하고 모순되기는 마찬가지다. 49년 전에 이미 신라를 신속시켰는데 왜 또 신라를 쳐야했는지, 49년 전에 일본이 한반도의 3국을 신속시킬 만큼 막강했다면 당시 왜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임나(가야)는 정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가, 이때 와서 새삼 임나를 평정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했다는 것인지 정치적이나 군사적 이유에서 볼 때도 이해할 수 없다. 또 『일본서기』에 이 때 출정한 장군들 여러 명의 이름만 나오고 있으나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는 “신라를 격파하고 이어서 비자벌·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고 한 것이 기록의 전부이다. 다른 나라와의 중요한 전쟁에 대해 구체적인 상황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이를 사실의 기록으로 볼 수 있겠는가?

셋째, 『일본서기』의 신라와 임나 정벌이 한반도에 관한 것이라면 『일본서기』는 물론 『3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어야 그 사실 여부를 검증받을 수 있다. 그러나 『3국사기』「신라본기」를 보면 320년이나 369년에 왜와 관련된 기록이 일체 없다. 그러므로 진구왕후의 3한 정벌이나 임나평정은 또 다른 근거가 없는 한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기 어렵다. 「신라본기」를 보면 왜와 관련된 기사로 312년(흘해이사금 3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의 혼인을 청하므로 왕은 아찬 급리의 딸을 보내 혼인시켰다.”고 했으며, 344년(흘해이사금 35년)에는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혼인을 청하였으나, 신라에서는 먼저 여자를 출가시킨 것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고 기록했다. 「신라본기」의 기록은 특별히 조작한 기사로는 보이지 않는데, 『일본서기』와 비교해 보면 양국 간에 혼인관계를 맺은 후 8년 만에 진구왕후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신라를 정벌한 것이 되어 부자연스럽다. 또 진구왕후가 신라를 신속시켰다면 그후 24년에 신라가 왜의 혼인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본기」에는 혼인을 거절한 다음 해(345)에 “왜국왕에게 글을 보내 국교를 단절하였다.”고 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왜병이 쳐들어 와 금성을 포위하였으나 이를 물리쳤다. 이후 364년(내물이사금 9년)에도 왜적이 크게 쳐들어 왔으나 대패하여 거의 다 죽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5년 후인 369년에 왜가 신라를 격파했다는 것이므로, 이는 앞선 두 번의 침입시에 패한 왜군의 전투력으로 보아 믿기 어렵다. 이처럼 양국의 관계는 양쪽의 기록을 면밀히 비교하여 고찰해야 함이 상식인데도, 김현구나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의 기사만을 일방적으로 믿고 논리를 전개하니 올바른 진실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 전 고려대학교 교수, 김현구씨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라는 자신의 책에서 임나를 경남, 전라남북도 충청도까지라고 그려놓고 사실상 임나일본부설을 전개하고 있다.

 

'천추만세' 길상문이 낙랑군 재평양설의 근거로 일제가 발굴한 와당에도 나와...

<일본서기>에서 가져온 것 아닐까?

 

진구왕후 49년(369)년 3월 조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왕 부자와 아라타와케·목라근자 등이 함께 의류촌에 모여서 서로 기뻐하고 후한 예로써 맞이하였다. 오직 지쿠마 나가히코와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 회맹하였다. 다시 고사산에 올라 함께 반석 위에 앉았다. 이때 백제왕이 맹세하여 말했다. ‘만약 풀을 깔아서 자리를 만든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나무로 자리를 만든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로써 지금 이후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항상 서쪽의 제후라 칭하고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 곧 지쿠마 나가히코를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를 더하고 구저 등을 함께 보냈다.”

 

백제의 전성기 정복군주, 근초고태왕이, 야마토 왜에 신속했다?

일본군이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니 백제왕 초고(근초고 대왕)와 왕자 귀수(태자 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서로 만났으며, 지쿠마 나가히코는 초고왕과 두 번이나 맹세를 했는데 그 내용이 초고왕이 왜의 신하로서 왜에 영원히 조공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3국사기』에는 일언반구도 기록된 바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일본열도 내의 임나에 관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다만 백제왕이나 태자의 이름을 한반도 백제의 왕이나 태자의 이름으로 쓴 것은 열도에서의 일을 한반도의 일로 조작하기 위한 『일본서기』 편자들의 붓장난이 아닌가 여겨진다. 김현구는 이러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서도 단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이때의 주체를 야마토 왜가 아니라 백제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이는 아래와 같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 타당하지 않다.

우선 근초고대왕은 일본 식민사학자들도 인정한 백제의 중흥군주로서 이후 태자 근구수대왕 때까지 백제가 위세를 떨치던 전성기였다. 『3국사기』「백제본기」를 보면 근초고대왕은 『일본서기』에 진구왕후가 신라를 치고 임나를 평정했다는 369년에, 고구려 왕병 2만의 침입에 태자를 보내 5천의 군사를 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런 백제의 근초고대왕이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나가히코에게 신속을 맹세하는 한심한 군주로 나타난다. 『3국사기』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이 해에 과연 근초고대왕이 한가하게 한반도 최남단까지 태자와 같이 내려 가 일본 군대를 만날 상황이었을까?

『일본서기』에는 3월 조에 위 내용이 나오며 신라를 격파하고 임나 7국을 평정한 뒤 초고왕을 만났는데, 그것이 한반도에서의 일이었다면 연말 안에 가능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리고 『3국사기』를 보면 근구수태자가 고구려병을 물리친 것이 9월이었으며 대왕은 11월에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왕과 태자가 함께 일본군과 만나려면 늦어도 8월까지 고해진에 갔어야 한다. 그리고 일군은 6개월 이내에 이 모든 작전을 완수해야 했는데 과연 경상도·전라도의 넓은 지역을 단시일에 제압할 만큼 그렇게 막강한 병력을 가졌을까?

가장 황당한 것은 근초고대왕 부자가 일본을 상국(上國)으로 떠받들기로 두 번이나 맹세했다는 것이다. 『3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근초고대왕은 위 369년의 2년 후 고구려군의 침입을 물리치는 한편 여세를 몰아 태자와 함께 3만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도읍 평양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위세를 떨쳤다. 또 근구수대왕은 377년에 3만의 병력으로 다시 평양을 치는 위용을 보였다. 중국과 대등하게 맞선 고구려를 치고 들어간 근초고·근구수대왕이 무슨 까닭으로 왜를 하늘같이 섬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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