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대한민국을 장악하다...

김명옥 전문기자

 

대한민국의 원형은 계획경제, 토지국유가 원칙이었다...

광복군 세력의 새 나라 정부수립의 국시였다...

북한이 도입한 서양식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우리만의 새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바른역사아카데미 시민강좌 10-2

‘해방공간의 정치사 - 남북정권 수립과정’ 이덕일 한가람연구소 소장

 

임정 요원들과 이승만이 귀국 상황을 비교하는 것도 정치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맥아더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가는데 맥아더는 조선 점령군사령관 하지를 도쿄로 불러 3자 비밀 회담을 가졌다. 10월 12일의 일이다. 이 3자 비밀회담에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이때 “큰 틀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3자 비밀 회담을 마친 이승만이 10월 16일 귀국하자 하지는 이승만을 처음 만난 것처럼 대했다. “우리 역사가 농락당한” 사례인 것이다. 중국의 임정 요원들이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11월 23일보다 미국의 이승만이 한 달 이상 빨리 귀국했다.

해방공간에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려면 우선 정치세력을 살펴야 한다. 우파 정치세력은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독립촉성중앙회 등이다.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은 임시정부내의 여당이다. 일제가 패망하자 한독당은 중경에서 1945년 8월 28일에 제5차 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주요 정책을 결정했는데, 임정은 귀국하면 집권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기본 강령은 “계획경제며 민주공화국이고 국비로 교육한다.” 행동 강령은 “지자체 실시로 중앙과 지방의 균권제, 토지 국유 원칙, 토지 인민에게 분급, 극빈 농민 우선권, 교육비는 국비로, 적산은 모두 몰수하여 국유로, 매국적과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를 징치하며 그 재산을 몰수해서 국영사업에 충용하고 토지는 국유로, 봉건 파시스트 등의 일체 반민주의 경향 숙청한다”로 되어 있다.

▲ 해방공간에서 백범 김구는 굳어지는 남북분단과 이어 벌어질 6.25동족전쟁을 막고자 필사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염원과는 반대로 그의 염려대로 남북은 분단되고 기어이 전쟁이 터졌다. 남쪽의 미군과 친일매국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의 정치욕 때문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났다. 사진 왼쪽이 김일성, 오른쪽이 백범 김구, 백범은 북쪽이 개최하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여 남북이 하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덕일 소장은 “이게 정상적인 진짜 우파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분들은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자들이지만, 사회주의 정책 중에서 국가 전체와 민족 전체를 위한 정책은 대폭 포용” 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의 토대는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다. 삼균주의는 “경제의 균등화, 정치의 균등화, 교육의 균등화”이다. “이 정책대로 갔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한민당은 일제 강점기 친일 지주가 많다. 해방이 되자 자신들이 직접 나서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임시정부를 추대한다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했다. “미군정에서는 사실상 한민당이 여당 역할”을 했다. 한민당은 군청적 요직과 경찰 및 검찰을 장악해서 일체의 민족협동전선을 반대하고,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혁을 반대했다.

독립촉성중앙회는 이승만이 귀국해서 만든 당이다. 친일파 참여 문제로 다수가 이탈하고 이승만 직계와 한민당 등 친일 세력이 대거 포진한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논지다. 이 발언은 “남한에서 최초의 분단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뜻이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이승만은 분단노선을 밀고 나갔다.

좌파 정치 세력은 조선공산당과 중도 좌파 정당인 조선인민당 그리고 남조선신민당이 있다. 좌파 세력 중 핵심은 조선공산당이다. 박헌영이 이끈 조선공산당은 ‘경성 콤그룹’이 모체이다. 소련 코뮌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을 해체 시켰기 때문에 ‘당’이라는 이름대신 ‘경성 콤그룹’이라고 불렀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의 조선혁명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라고 말했다. 이 단계를 거쳐서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간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는 “민족적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과업”라는 것이 박헌영의 주장이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제 간첩으로 몰아 숙청한 후 조선공산운동에 대해서 남한 못지않게 격렬하게 비판했다. 자신은 조선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부인해야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4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이북 5도당 및 열성자 대회를 열어서 민주기지론을 제창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 이것은 “세계 공산주의사에서 유일한 사례로 코민테른의 1국 1당주의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사실상 1국 2당주의이다. 김일성은 이런 방식으로 북조선분국을 설치해 당권을 잡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해 권력을 장악했다.

여운형이 이끈 조선인민당은 조선건국위원회가 모체이다. 여운형은 백의사 한지근에 의해 암살당하는 당일(47.7.19) 김용중에게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한다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 받고 있소…친애하는 김선생.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 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 받고 있소." 라는 편지를 썼다. “정권과 조금만 다른 뜻을 말하면 종북좌파로 모는 오늘날의 상황과 똑 같다.” 백의사는 염동진이 만든 우파 테러 조직이다. “미국 CIC에서는 백범 암살자 안두희도 백의사 단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중앙회는 235명 입후보에 55석을, 김성수가 수석 총무인 한국민주당은 91명 입호부에 29석을, 지청전이 단장인 대동청년단은 68명 입후보에 12석을 차지한다. 무소속이 가장 많은 85명으로 득표율 42.5%를 차지했다. 이덕일 소장은 “백범의 한독당이 제헌선거에 참여했다면 제1당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범이 제헌선거를 거부한 분단 반대라는 명분을 옳지만, 한독당이 선거에 참여 했다면 제1당이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이덕일 소장은 설명한다.

한민당은 무소속을 포섭해서 80여명을 확보하고 내각책임제를 당론으로 세운다. 한민당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김성수를 총리로 하는 구상을 하였으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주장하였다. 이에 한민당은 국무총리와 국무의원 과반수를 확보하는 조건으로 대통령제를 수용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였고, 이것이 부결되자 이승만은 다시 이범석을 지명한다. 이범석의 지지 요청에 대해 김성수는 12부 4처 중 6석을 한민당에 배정하면 협조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범석 당선 후 한민당을 배제했다. “한민당은 이승만의 배신으로 타의에 의해 야당의 길을 걷는다.” 즉 보수 야당 한민당은 타의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 남쪽에 진주한 미군 하지중장이 백범김구와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있다. 백범 김구 왼쪽은 이승만이다. 미군정은 결국 이승만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친일독재의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승만이 친일파와 미군정을 등에 업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후 정적으로 치부된 백범 김구는 친일세력에 의해 희생된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1949년 6월을 전후해 3개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국회 프락치사건과 반민특위 해산, 그리고 백범 김구 암살이다. 1949년 5월 경부터 13명의 국회의원들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정재한이라는 42세의 여성이 월북하려는 것을 경찰들이 정보를 입수하여 체포하였는데, 국회의원들이 프락치라는 문서를 찾았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모두 정재한을 모른다고 증언하면서 대질을 요구했지만 유일한 핵심증인인 여성 공작원 정재한은 끝내 재판정에 안 나타난다. 이 재판을 지켜보던 핸더슨(미 대사관 문정관)은 “정재한은 가공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국회 프락치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1949년 6월 3일 국민계몽대 3~4백여 명 군중들 반민특위 사무실 몰려와 "특위 내 공산당 숙청을 요구"한다. 반민특위는 경찰을 요청했으나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6월 4일 친일경찰들이 특위를 습격해서 특위를 무력화 시켰는데,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이 경찰들의 특위습격을 지시한 것이라고 6월 9일 밝혔다. 7월 6일 반민특위를 무력하시킨 반민법 개정안(49년 8월까지)이 통과 되고 반민특위는 해산된다. 얼마 전 세월호 특조가 무력화된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반민특위 해체 사건 와중에 발생한 일이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암살이다. 저격 직후 헌병대 군인들이 나타나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신병을 인수해 간다. 또한 암살 당일 이승만은 일제 경찰 간부 출신이었던 헌병 부사령관 전봉덕을 사령관으로 승진시켜 안두희 처리를 맡겼다.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로 이승만이 거론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안두희는 불과 1년 남짓 복역한 후 석방되어 다시 장교로 복직했다.

그 후 한국변호사협회 회장까지 역임했던 전봉덕은 80년대에 “백범 암살 진상위원회가 만들어진다는 말을 듣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주도하는 현실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다. 그래서 1950년 5월 30일에 실시한 제2대 총선에서 독립촉성중앙회(이승만)는 55석에서 14석으로 줄어든다. 득표수는 6.8%였다. 아마 전 세계 역사상 집권당 득표수로는 최하위일 것이다. 전체 210석 중 무소속이 126석을 차지한다. “사실상 이승만 정권의 파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 달 후의 6.25 사변으로 이승만 기사회생한다.

이덕일 소장은 “친일구조와 남북대결구조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하는 게 우리의과제다.”라며 “백범 김구 선생은 ‘세계 각 민족과 각 나라하고 우리와의 결사하는 관계가 맺어질 겁니다’는 희망의 말씀을 하셨다. 이 말이 현재 진행형이 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며 강연을 마쳤다.

국정교과서와 관련된 질문이 있었다. “교과서에 대한민국수립이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대한민국 수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차이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이었다. 이덕일 소장은 3·1혁명 이후인 1919년 4월 12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고 설명했다. 임시정부의 모든 공식문서는 대한민국 ○○년으로 표기했다는 이유다. 임시정부에서는 BC 2333년 10월 3일을 건국기원절로 삼아서 매년 기념했다. 즉 우리 역사의 건국은 BC 2333년 10월 3일이고, 대한민국 건국은 1919년 4월 12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 국내에서 명실상부한 정부를 세운 날짜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뉴라이트들이 1948년 8월 15일에 나라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립운동사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친일파들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주기위한 불순한 의도라는 것이다.

이덕일 소장은 강연 서두에 국정교과서에 대해 설명했다. 모든 촛점이 근현대사에 집중되어 있는데 고대사 문제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정교과서의 고대사는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그대로 따라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삼국 초기의 역사를 부인한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가야연맹을 서술하면서 ‘왜’가 마음대로 한반도에 들락거렸다는 식으로 서술했는데, 아마도 한국고대사학계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반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척해도 고대사에 관한 한 그 속마음이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지난 12월 7일 서울교육대학교 에듀웰센터 2층 컨벤션홀에서 독도가 한국 땅인 국제법적, 역사적 근거와 국내학계의 일본극우편향 연구 실태에 대하여 독도 전문가인 정태만 박사가  밝힌바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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