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과연 우리 우방인가?

김명옥 전문기자

 

현재 대한민국은 서기1945해방공간에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친일파는 대를 이어 종북몰이, 좌파팔아 기득권 누리고 있어...

반민특위훼방, 세월호 조사특위 훼방 놓는 구조 그대로 되풀이...

 

 

바른역사아카데미 시민강좌 10-1

‘해방공간의 정치사 - 남북정권 수립과정’ 이덕일 한가람연구소 소장

 

‘일제식민사관 극복과 민족정체성 재정립’을 위한 2016년 바른역사아카데미 역사강좌의 마지막 주제는 ‘분단을 넘어 통일로’이다. 제 3주제의 첫 강연자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었다.

이덕일 소장은 “우리 역사의 잘못된 뿌리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서 중 하나”라며 ‘한국의 미국 점령지역 내 민간 행정업무에 대하여 태평양 방면 미군 최고사령관(맥아더)에게 보내는 기본훈령(1945.10.13. 승인)’을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미국은 맥아더에게 38선 이남 미국의 점령지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 이렇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귀하는 현존하는 모든 정당, 단체 및 정치적 결사를 귀하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활동이 군사적 점령의 목표 및 요구와 일치하는 단체는 장려되어야 한다. 그 활동이 군사점령의 목표 및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귀하는 어떠한 자칭 한국 임시정부 혹은 유사한 정치적 조직에 대해서도, 비록 상기 9a항에 의거하여 그 존립, 조직 및 활동은 허용하더라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든가 정치적 목적에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귀하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그 조직에 대해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은 채 그러한 조직의 성원을 개인 자격으로서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서는 미국이 38도선 아래를 자국의 군사점령지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한국 임시정부 및 유사한 정치적 조직에 대해서 큰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확인된다. 문서에서 가리키는 임시정부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뜻하는 것이며, 유사한 정치조직이란 해방 직후 여운형 주도로 만든 ‘조선 인민공화국’을 뜻한다는 것이다. 여운형이 주도하는 ‘조선인민공화국’뿐만 아니라 김구가 주도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모두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가진 미군정의 남한 통치가 원활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고 말했다.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남북분단이 일본이 근본원인을 제공했다고 보았다.

연합국 수뇌부가 한국민의 노예상태를 감안해서 독립시키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지만 일정한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거치겠다고 구상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945년 2월 4일부터 8일까지 미·영·중·소 수뇌부가 얄타에서 모여서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을 미·중·소 3국 대표로 구성된 신탁통치위원회 관리 하에 둘 의사(「한국의 신탁문제를 논의」, 『얄타 비밀협정-미 국무성 발표 전문』, 합동통신사, 1956.)”를 가지고 있음을 표시했다.

미국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권고했는데, 스탈린은 유럽전선이 종결되면 2~3달 안에 참전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대가로 러일전쟁(1904) 이전 제정 러시아가 아시아에 갖고 있던 이권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모국을 자처했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하는 데는 제정 러시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제정러시아가 러일전쟁으로 상실한 중국 옛 영토를 달라는 말이었다. 하얼빈이나 대련 등지의 조차지를 뜻했다. 이제 전승국의 일원으로 대접받는 장개석은 당연히 거부했고 스탈린은 대일전 참전을 거부했다.

1945년 7월 26일 미·영·중·소의 대표는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했다. 이때도 스탈린은 얄타회담과 같은 요구를 했고, 장개석은 거부했다. 그러나 이때는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극비리에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기 때문”이란 게 이덕일 소장의 설명이다.

포츠담선언 불과 10여일 후인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廣島)와, 8월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폭(原爆)을 투하했다. “원폭에 놀란 소련은 전후 자신들의 이권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에도” 나가사키 원폭 당일 전격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한다. “자칫 아시아에서 아무런 전리품도 챙기지 못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덕일 소장은 한반도 분단의 여러 원인 중 하나는 “일본군이 싸움을 너무 못해서”라고도 분석했다. 자칭 천하무적 관동군이 소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80~100만에 달했던 자칭 전하무적 관동군은 소련 참전 소식에 총 한 방 제대로 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붕괴되고 말았다. 이것이 일본군의 진짜 실력이다. 그래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것을 두려워한 미국에서 부랴부랴 38도선으로 분할할 것을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이 뜻밖에도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38도선이 분단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덕일 소장은 해방공간의 정치상황을 볼 때 한반도만 보지 말고 동아시아 전체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초 미국은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의 국민당이 승리할 것을 전제로 전후 동아시아 정책을 짰다. 장개석의 중국을 반공의 보루로 삼고 일본의 파시스트 세력을 청산함으로써 일본을 민주화하려는 계획이었다. 만약 이대로 되었으면 지금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이기자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는다. 전후 대만과 남한은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된다는 발언을 해서 북한의 남침을 자극했던 애치슨 발언이 나온 배경이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 미국의 역코스 정책이 시작된다. 도쿄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들 7명만 교수형 시키고 나머지 수감자는 얼마 후 다 석방시켰다. 공직추방령도 해제해서 공직에 추방되었던 사람들도 다 복직 시킨다. 이덕일 소장은 “대만과 한국을 침범한 전범들은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다. 지금의 일본 우익이 준동하는 계기가 된 것은 모두 미국의 이 역코스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북 분단 원인은 미국과 소련이 각자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이고, 여기에 남북한 간의 분단세력들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의에서 미국은 한국인들로 구성되는 임정 수립 없이 4대국이 직접 신탁통치 해야 한다는 안을 제시한 반면 소련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조선의 여러 정당 및 사회단체가 미·공동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동아일보』(1945. 12. 27자)에서 사실과 반대의 기사를 내면서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동아일보』가는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거꾸로 보도했다. 이덕일 소장은 사실 4대국 신탁통치를 하면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 1국인 반면 미·영·중이 모두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 우익들이 신탁통치 반대가 최선이었는가를 자문해 볼 때라고 말했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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