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의 폐해가 삼국 대륙설을 낳았다.

 

글: 전우성(역사저술가, 관세사)

 

삼국사기 지리지의 홀승골성은 현재의 요하 서쪽 아냐

산동성 호타하가 압록수, 이 인근이 고구려 건국지

백제, 신라의 대륙활동 기록으로 고구려 건국지 확인

 

▲ 졸본성 위치와 이동
▲ 졸본성 위치와 이동

 

“고대국가 위치를 찾아서”(우리 고대국가 위치를 찾다)

우리 고대국가가 탄생한 삼한의 위치는 기존의 사서 기록 해석을 올바르게 하고 제대로 적용함으로써 한반도가 될 수 없고 대륙임이 확인된다.

이러한 삼한의 대륙 위치는 이에서 탄생한 삼국의 건국과 건국 후의 활동 사항에 의하여 그 위치가 같은 곳임이 명확히 입증된다.

3. 삼국의 형성과 위치(1)

우리 고대국가 삼국 내지 사국의 건국 사항과 활동 사항을 확인하면 그 위치가 한반도에는 맞지 않고 대륙 특히 원천적으로 동이족 영역이었던 산둥성임이 확인된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하북성 고조선 및 고조선의 정통 후예국인 부여에서 출발한 관계로 이 선조국가의 옛 영역을 회복하고자 건국 위치인 산동성에서 이곳 하북성으로 진출한 것이 확인된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의 요동 진출 확보와 백제의 요서 진출이다.

중국 측은 이러한 사실 즉 산동성 건국 및 하북성 진출 사실을 혼동하여 모르거나 아니면 고의로 배척하고자 사서 기록상에 그 혼란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역사적 사실을 조작 내지는 왜곡함이 확인된다.

이의 대표적인 사항이 백제 요서진출 시기로 확인되는 백제 근초고왕의 20년 기간의 누락과 중국사서 남제서의 백제 요서 진출 기록 훼손이다.

또한 고구려는 산동성 및 하북성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그동안 왜곡 해석하여 한반도로 고착시켰다.

1. 먼저, 고구려 첫 도읍지 기록을 살펴보면,

1).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에 대한 중국 사서 기록과 이를 그대로 인용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 하북성 현토군 고구려현에서 탄생한 구려 및 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이 나오는데 이를 나중의 선비족을 고구려로 착각한 채, 고구려가 이곳에서 첫 도읍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 지리」‘고구려’‘고구려 초기 도읍 홀승골성과 졸본’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주몽(朱蒙)이 부여(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곧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같은 한 곳이다. 《한서지(漢書志)》에서 이르기를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에서 3천 6백리 떨어져 있으며, 속한 현으로서 무려(無慮)가 있다.”고 했다. 곧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때에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또 한서지에] “현도군(玄菟郡)은 낙양(洛陽)에서 동북으로 4천리 떨어져 있고, 속한 현이 셋이며, 고구려가 그중 하나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고,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며, 《한지(漢志)》에 이른바 현도(玄菟)의 속현 고구려(高句麗)가 이것일 것이다. 옛날 대요(大遼)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遼)의 황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니, 곧 우리의 조빙하는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에 의주(醫州)에 이르러, 연계(燕薊)로 향하였음으로 고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 인용]

2). 이러한 위치 기록을 그동안 중국측이 역사왜곡한 바에 의하여 이와 관련된 사실 즉 현토군, 요나라 동경 등을 요령성 요하 인근이나 한반도 북부로 위치로 옮겨 해석하여왔다.

3). 그러나 이에 의하더라도 그 위치는 요령성 요하 서쪽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식민사학들이 전혀 사서 기록과 관계없이 요령성 환인시 오녀산성으로 위치시켰다.

4). 이와같이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는 하북성 위치에서 요령성 요하 서쪽으로 옮겨지고 여기서 다시 한반도 북부지방으로 왜곡 이동시켜져 왔음이 확인된다.

2.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 관련 기록과 고구려 위치 기록에 의하면 이들 위치 중 하북성 위치도 확인되지만, 산동성에서의 건국과 위치 기록이 명확히 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확인은 이전의 역사 인식과는 다른 왜곡 이전의 인식에 의하여야 한다.

1). 먼저 건국 과정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그 건국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중국사서가 없다. 단지 이미 확인한 바대로 『삼국지』와 『후한서』가 고구려를 구려와 착각함으로써 현토군 고구려현에서 건국한 것으로 기록한 것 이외에는 단지 건국 후 고구려의 위치만 기록하고 있다.

2).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건국과정 기록은 압록강 인근에서 활동하던 선조인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부여에서 출발하여 엄리(대수)(엄사수. 개사수, 엄리대수, 엄체수, 엄수)를 건너 갔다고 한다.

이는 하북성 압록수인 지금의 호타하 이북 지방에서 이 호타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산동성 지방의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지방에서 건국한 것으로 해석된다.

3). 이러한 위치는 이후 중국사서가 기록한 고구려의 위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고구려 자체 역사활동은 물론 백제와 신라와의 역사적 활동으로 입증된다.

(1). 우선, 고구려의 위치 기록을 확인하면 그 혼란상이 확인된다. 즉 하북성 고구려와 산동성 고구려 위치가 각각 혼재된 채 기록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고구려가 하북성 및 산동성에 있음으로 해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다.

(2). 그러나 명백히 산동성 기록으로 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기록이 확인된다.

① 위서와 북사 기록상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소해 즉 작은 바다인 어느 하천을 경계로 백제와 경계하고 있다는 기록이 그중 하나이다. 이러한 고구려전 기록은 백제의 북쪽에 역시 소해가 있다는 위서, 북사. 신당서, 구당서 백제전 기록에 의하여 이곳이 한반도가 아님이 입증된다. 한반도에서는 바다(海)에 대한 해석 여부와 관계없이 어느 하천을 기준으로 고구려와 항상 맞붙어 있지를 아니하였다.

② 주서와 북사의 동쪽으로 신라에 이른다는 기록이 그 다른 하나이다. 이러한 고구려전 기록은 신당서, 구당서 상의 동쪽으로 바다를 지나 있다는 기록에 의하여 이 바다(海) 해석 여부에 따라 이곳이 한반도가 아님이 확인된다. 왜냐하면,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의 동쪽에 신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건국과 위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하북성 및 산동성으로 나타난다. 산동성이 고구려 건국지역이라는 것은 이후 고구려 역사적 활동 기록으로 알 수 있지만, 고구려와 역사적 활동을 같이한 백제와 신라의 건국과 위치 기록으로 증명된다. 다음에는 백제와 신라의 건국 및 위치 기록에 관하여 확인해 보고자 한다(고대국가를 찾아서 5).

- 유튜브 채널 : 채널명 : “고대국가 위치를 찾아서”

https://www.youtube.com/@ancient-history.youtubecreator

- 집필본 단행본 10권중 1~5권 : 우리 고대국가 위치를 찾다(도서출판 한솜미디어, 2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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