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2천억원 들여 가야사 복원하라고 했더니 조선총독부 역사식민지로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 국고 1천 2천억원 들여 가야사 복원하랬더니

가야 시조 김수로, 허왕옥 부정 및 가야 개국 연대 축소

가야 지명을 모조리 조선총독부 일제 식민사학자 것 복사

고대 야마토 왜의 임나일본부가 식민지배한 것으로 지명 비정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 역사 말살하는데 부역한

이병도, 신석호 등의 후예들이 한국역사학 장악,

식민사관으로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인의 역사의식 마비시키고

한국인의 혼을 빼앗고 있어

▲ 일제식민사관의 두 축은 평양에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있었다는 것과 남부지방에 고대야마토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남북으로 식민사학 악의 축이 된 쓰다 소키치의 1913년 낙랑군과 임나열국(한글재편집 지도)
▲ 일제식민사관의 두 축은 평양에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있었다는 것과 남부지방에 고대야마토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남북으로 식민사학 악의 축이 된 쓰다 소키치의 1913년 낙랑군과 임나열국(한글재편집 지도)

 

문재인 정권이 가야사 복원사업으로 국고 1조 2천억원을 투입하였다. 문재인 정권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가야사는 제대로 복원되고 있는가.

가야사 복원사업이 국책사업으로 처음 지정되었을 때 부터 민족사학계는 식민사학과 식민고고학세력이 장악하여 돈벌이 터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예상은 적중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우리의 사료와 우리의 눈으로 가야사를 보고 복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극우파의 시각으로 그들의 학설을 그대로 배껴다가 가야사에 덧칠하였다. 

사료로서의 가치가 훨씬 높고 실증적으로 집필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소설책 수준의 <일본서기>로 가야사를 날조하였다.

가야사 지명을 모조리 <일본서기>로 비정하였다. 이는 고대 야마토왜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식민지배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이렇게 비정된 지명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제가된 임나일본부설은 어떻게 창작되었을까. 이찬구 박사가 적나라하게 밝혀 눈길을 끈다. 아래는 이찬구 박사의 발표를 요약한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그 강역을 확장해나갔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삼국유사》 불신론을 주창하면서 가야의 건국시기를 끌어내린 이유는 가야를 임나로 둔갑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다.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는 4세기 후반에 야마토 왜(倭)가 가야를 점령해 임나를 설치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삼국유사》 에 의하면 그런 사실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야사 왜곡에 더욱 집중하였다.

일본육군참모본부는 1882년에 《임나고(任那考)》, 《임나고고(任那稿考)》, 《임나명고(任那名考)》 등 임나 책을 간행하였고, 1889년 《회여록(會餘錄) 》 5집에 <고구려고비>를 왜곡하여 해석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어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의 《가라사》 저술(1897),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1913년 <임나강역고>에서 남부지방을 임나가 속령(屬領)으로 통치했다고 말하고, <임나열국도>지도를 그려 김해를 가라, 함안을 안나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는 한 걸음 나아가 김해 패총조사(1915)를 마치고 임나일본부가 김해, 함안에 있었다고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이찬구 박사는 악의 축 형성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그 시기별로 관련 학자들도 언급하였다.

▲정한론 3인방 : 요시다 쇼인(吉田松蔭1830-1859), 후쿠자와유치키(福澤諭吉1835-1901),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

▲조선사왜곡의 3인방(편수회 이전) :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65-1942),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

▲조선사편수회 3인방 : 이마니시류(今西龍1875-1932, 촉탁 1926~1932근무),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1876-1940, 촉탁1925, 수사관 및 간사 1925-1937근무), 쓰에마스 야스카즈(末松保和1904-1992, 촉탁1927.-1928, 수사관보1928.-1935, 수사관 1935근무)

▲조선사편수회 조선인 2인 :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수사관보1925.8.8.-1927.5.30., 촉탁 1927.5.31.-1945근무) 신석호(申奭鎬1904-1981, 촉탁 1929.4.27.-1930.5.2., 수사관보1930.5.2.-1937.9.22., 수사관 1937.9.22.-1945)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한사군설과 임나일본부설은 식지 않고 계속 확대 재생산되었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이 더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이박사는 지적한다.

한반도의 북과 남에 대못을 박은 일본 극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내 식민사학자들과 함께 임나에 목숨을 걸고 악의 축을 지키려고 한다.

이병도, 신석호를 비롯한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한국 사학계를 장악하였고, 식민사학은 사학계과 언론들이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일본 극우와 맥을 같이하고 국내에서 더욱 공고하게 친일화를 꾀하고 있다. 토착왜구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박사는 국가기관이 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라고 내다본다.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과 지방박물관이 임나일본부설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남원은 일본 지명 기문(己汶), 합천은 다라(多羅), 하동은 대사(帶沙)라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의 학설을 남한 학자들이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급기야 이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남원을 기문으로 처음 비정한 것은 100년 전 이마니시류의 <기문반파고>(1922)라는 논문이다. 논문 내용이 견강부회가 심해 차마 읽을 수 없다고 한다.

이어 합천은 다라(多羅), 하동은 대사(帶沙)라고 지명 비정을 한 것은 쓰에마스 야스카즈의 《임나흥망사》(1949)이다.

지금도 중앙박물관 가야본성 전시실에는 기문-다라-대사라는 임나의 삼각벨트가 그려져 있다. 쓰에마스의 지도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 대한민국 국립박물관의 자화상이다.

마치 쓰에마쓰가 부활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쓰에마쓰는 임나의 영역마저 김해~함안 일대에서 경상도~전라도 지역으로 크게 확장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선생은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는 한사군”이라고 밝혔다는 점을 상기할 때라고 했다.

여기에 임나일본부설까지 가세하며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고 있고 한국인의 혼을 빼앗고 있다.

끝으로 이찬구박사는 한사군 B.C. 108~313, 임나일본부 369~562년을 다시 말하면 B.C. 108~A.D.562년까지 도합 670년을 우리가 허구의 외세지배론에 속아왔다면서 이제라도 이 악의 축을 혁파하는데 모두 나서자고 강조했다. 남원, 합천시민과 함께 역사 시민혁명을 맞이하길 염원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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