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재평양설, 야마토왜 임나일본부설 이 식민사관의 두 축이다.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은 식민사학

한사군설과 임나일본부설은 식민사학을 구성하는 악의 축

갈등의 누적으로 한국사회는 갈등단계를 넘어 혐오단계

민족사학이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한 광의의 역사학이라면,

총독부에 의해 조작된 역사학이 식민사학

 

▲ 이나바이와키치(稻葉岩吉).그는 일제침략기 일제식민사학자로서 중국 한나라의 식민기관인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 이나바이와키치(稻葉岩吉).그는 일제침략기 일제식민사학자로서 중국 한나라의 식민기관인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식민사학은 악의 축이다”

이찬구 박사 한사군설과 임나일본부설을 악의 두 축으로 규정

이찬구 박사(미래로가는 바른역사협의회 공동대표)는 국제정치에서 사용된 악(惡)의 축(軸)(axis of evil)이라는 말을 조선총독부가 끼친 해악의 근원인 식민사학에 적용시켜 이를 ‘악의 축’이라 규정하였다.

이박사는 1월 15일 ‘남원가야역사바로알기시민모임’(대표 곽충훈)이 주관한 “2022남원가야사 시민강좌”에서 “민족사학과 식민사학”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일제에 의해 왜곡 구축된 한사군설과 임나일본부설을 식민사학을 구성하는 ‘악의 축’으로 처음 규정한 것이다.

악의 축이란 그로 인한 해악과 범죄성이 극악한 것을 지칭한 것으로 식민사학계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이박사는 한국사회를 이념간 갈등, 진영간 갈등, 남녀간 갈등, 빈부의 갈등, 종교간 갈등 등으로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러나 이런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도 거론조차 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역사관의 갈등’이라고 지적했다. 그 내용이 ‘민족사학과 식민사학’의 갈등이다.

이런 갈등의 누적으로 한국사회는 갈등단계를 넘어 혐오단계로 바뀌고 있다며 우리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 위험성의 근원이 식민사학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사학이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한 광의의 역사학이라면, 총독부에 의해 조작된 역사학이 식민사학이다.

식민(植民)사학이란 일제 침략자의 관점으로 한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 왜곡하는 역사학이다.

그 이론적 토대는 19세기 말 정한론(征韓論)과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神功)의 신라 및 삼한 정복설의 왜곡과 광개토태왕비문의 신라백제 정복설의 왜곡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정한론의 직접적 토대를 1875년 강화도 조약의 불평등성에서 찾고 있고, 또 1894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단군역사를 불교를 통한 조작(造作)이며,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로 본 그의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에서 찾고 있다.

이박사가 근거로 제시한 악의 두 축인 한사군설과 임나일본부설을 그의 논문에 의거하여 정리해보겠다.

한사군설이란 평양 대동강에 있는 한(漢)의 식민지 지배설을 말하며, 임나일본부설은 남부 지역의 가야영역을 야마토 왜가 일본부를 두고 임나로 지배했다는 남선경영론을 말한다.

한사군설을 만든 자를 중국과 일본의 공범으로 보고 있고,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단독범행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악의 두 축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고적조사위원으로 1910년 이전부터 조사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10년 2월, 평양 대동강 고분은 고구려 것이 아니라 낙랑군 고분이라고 결정적 거짓말을 했다.

그는 고분에서 나온 벽돌묘(전실묘·塼室墓)가 중국 한나라의 무덤과 흡사하며 출토유물 또한 요동(遼東) 지역의 한나라 무덤과 닮았다며 이것이 낙랑고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1910년 왕험성은 평양이라는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고 왕험성은 대동강 토성리(조선현)라고 주장했다.

이즈음 가장 결정적으로 형성의 기초를 놓은 자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이다. 그는 1913년 《조선역사지리지》의 <패수고>에서 패수를 정약용과 같이 압록강으로 보고, 한사군이 압록강 이남에서 부터 한강 이북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그가 낙랑군 지도를 그려 처음으로 위치를 비정했다. 이어서 그는 같은 책의 <임나강역고>라는 논문에서 경상도 남부지역에 ‘임나열국도’를 그려 넣었다.

쓰다 소키치가 1913년 남과 북에 그린 두 장의 지도가 악의 축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고, 스스로 식민사학의 괴수(魁首)가 되었다.

이렇게 쓰다 소키치가 깔아놓은 토대 위에서 한사군설은 점점 확장되어 갔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1914년 가짜 점제현신사비 발견소동을 벌이고, 평양이 낙랑군의 소재지라고 했다. 조선사 서술을 노골적으로 한사군부터 시작한 자가 이마니시 류이다.

급기야 조선총독부는 1915년 《고적도보》를 통해 평양 대동강 남쪽인 토성리가 낙랑군 군치소(조선현)라고 결론내렸다. 이로부터 한사군설은 고착되어 오늘의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요지부동으로 전해오고 있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출장을 다녀온 일기장(1918)에는 북경 유리창에 가서 한대(漢代)와 낙랑유물들을 구입해 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한사군 조작을 위해 혈안이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