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수 작가가 식민사학과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역사관 제시하였다.

 

고구려사략의 눈을 통해 본 광개토왕과 장수왕_2편

삼국사기 보다 고구려사략이 8배정도 많은 역사 사실 저시

고구려사략의 가치는 집안서 발견된 판석 내용을 증명한 것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시리즈의 저자인 정재수 작가

고구려사략의 장례 기록을 통한 길림성 고구려 무덤 떼 주인 찾아

최초 공개하는 태왕차자릉 판석을 통해 밝혀지는 장수왕의 생부 ‘용덕’의 실체

▲ 만주 고구려 집안에 조성된 고구려 태왕릉 등의 무덤떼.
▲ 만주 고구려 집안에 조성된 고구려 태왕릉 등의 무덤떼.

 

 

『고구려사략』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왜정시기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왕실도서관(서릉부)에서 필사해 온 것이다. 『삼국사기』의 약 8배 분량이다. 이러한 책이 환단고기와 마찬가지로 위서로 분류되어 우리역사연구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러한 남당유고(남당 박창화 선생이 필사해온 문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인 정재수 작가가 책을 썼다.

이 책은 『고구려사략』을 통해 광개토태왕릉비의 결자를 추적하고 길림성 고구려 무덤떼의 진짜 주인을 찾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본 저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태왕차자릉 판석을 통해 밝혀지는 장수왕의 생부 ‘용덕’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을 싣고 있다.

한 까페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1편에 이어)

기자 : 유물유적 부문에는 어떤 내용을 담았습니까? 특히 새롭게 밝힌 것은 어떤 것인가요?

정재수 작가 : 길림성 집안의 고구려 무덤떼에 소재하는 왕릉급의 무덤주인을 특정한 것이 핵심입니다. 모두 『고구려사략』에 나오는 주요 인물의 장례 기록과 해당 무덤의 출토 유물의 상관성을 따져 고증하였습니다. 집안의 고구려 무덤떼에는 1만 1천여 기의 무덤이 존재합니다.

주로 왕족과 척족, 그리고 귀족들의 무덤인 전형적인 고구려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死者의 도시)이지요. 시기적으로는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대략 170여 년간 집중 조성된 무덤떼입니다. 이 곳에 묻힌 왕은 고국원왕을 비롯하여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명왕 등 5명입니다.

기자 : 5명 왕의 무덤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정재수 작가 : 고국원왕은 서대총, 고국양왕은 천추총, 광개토왕은 태왕릉, 장수왕은 장군총, 문자명왕은 오회분 2호묘입니다. 좀 더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서대총의 경우, 무덤 중앙이 심하게 파헤쳐져 있습니다. 이를 두고 모용황이 파괴한 미천왕릉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구려사략』은 미천왕릉을 석굴무덤으로 표기하고 있어 서대총이 될 수 없습니다. 『고구려사략』에 따르면 고국원왕릉은 원래 명칭이 금관릉인데 영류왕때 말갈이 무덤을 파헤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서대총이 심하게 훼손된 이유입니다.

천추총의 경우, 인근에서 발견된 《집안고구려비》와 연관되는데, 『고구려사략』에 광개토왕이 고국양왕의 공덕비를 세운 기록이 명확히 나오고 있어 천추총은 고국양왕릉으로 특정됩니다. 태왕릉은 광개토왕릉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고요. 장군총의 경우는 장수왕릉이 맞으나, 『고구려사략』에 따르면 원래 장군총은 장수왕의 어머니 평양왕후의 홑무덤(단장)이나, 장수왕의 유언에 따라 추가로 장수왕의 시신이 돌방에 안치되며 어울무덤(합장)이 됩니다.

기자 : 문자명왕의 오회분2호묘는 처음 특정한 것 같은데 어떤 근거입니까?

정재수 작가 : 오회분(五盔墳)은 외형이 ‘투구(盔)’를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5개의 흙무지무덤입니다. 이 중 2호묘는 한 변 길이 55m로 가장 규모가 큽니다. 문자명왕의 아버지 조다태자 무덤은 2호묘 옆의 돌무지무덤인 우산하2110호분입니다. 특히 우산하 2110호분은 남북길이가 동서길이보다 월등히 길어 『고구려사략』은 황산장릉으로 적고 있는 무덤입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사략』에 문자명왕을 황산장릉 옆에 장사지낸 기록도 나옵니다. 바로 오회분 2호묘를 지칭한 기록이지요.

기자 : 이 외에도 무덤주인을 특정한 무덤이 있나요?

정재수 작가 : 대표적으로 임강총(臨江塚)을 들 수 있습니다. 임강총은 압록강 변에 위치한다하며 붙여진 이름으로 태왕릉과 《광개토왕릉비》에 인접합니다. 집안의 고구려 무덤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돌무지무덤입니다. 동서 71m, 남북 76m로 태왕릉(66m×65m)보다도 월등히 큰 대형의 왕릉급 무덤이지요. 무덤주인은 광개토왕의 어머니 천강태후입니다. 무덤에서 출토된 ‘×’자형이 새겨진 청동인형차할(車轄)이 이를 증명합니다. ‘×’자는 ‘하늘의 으뜸’을 가리키는 ‘천강(天罡)’을 도식화한 문양입니다.

이 외에도 3개의 돌방이 붙어있는 삼실총은 장수왕시기 백제 정벌에 남다른 공을 세운 화덕(華德)→호덕(好德)→양덕(陽德)으로 이어지는 3대의 부마무덤으로 확인됩니다. 이들의 이름과 활약상이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고 『고구려사략』에만 상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또한 마조총(말구유무덤), 각저총(씨름무덤), 무용총(춤무덤) 등의 무덤주인도 『고구려사략』에 명확히 나옵니다.

기자 : 혹시 평양의 고구려무덤떼에서도 무덤주인이 확인된 경우도 있나요?

정재수 작가 : 傳동명왕릉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평양시 역포구역 제령산 기슭에 소재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입니다. 무덤은 기단돌무지무덤과 돌방흙무지무덤이 결합된 형태로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이지요. 산중에는 과거 진파리 고분군으로 불린 20여기의 무덤이 분포합니다. 평양일대에 조성된 또 하나의 네크로폴리스이지요.

이 무덤의 주인공은 동명왕이 아닙니다. 문자명왕의 뒤를 이은 안장왕의 무덤입니다. 『고구려사략』에 명확히 나옵니다. 우산(牛山)의 장옥원에 장사지낸 안장왕릉(안장릉)입니다. 평양일대에서 평지가 아닌 산중에 무덤을 쓴 경우는 傳동명왕릉이 소재한 이 일대가 유일하죠. 또한 평양 북쪽의 대동강 북쪽 연안의 ‘경신리1호분’은 ‘한왕묘(漢王墓)’로 불리는데, 『고구려사략』에 ‘한왕’에 봉해진 인물이 정확히 나옵니다. 안장왕의 장자로 왕이 되지 못하고 대신 한왕에 봉해진, 양원왕의 아버지 각(恪)태자입니다.

기자 : 무덤주인의 특정 말고 특별히 새롭게 밝힌 내용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정재수 작가 : 고구려왕의 연호 문제를 일괄 정리하였습니다. ‘천하의 으뜸국가’인 ‘국강(國罡)’을 선포한 고국원왕으로부터 마지막 보장왕까지의 연호입니다. 고국원왕의 경우, 황해도 안악3호무덤의 ‘영화3년’명 동수의 묵서와 평양역벽돌무덤의 ‘영화9년’명 동리의 벽돌에서 확인됩니다. 학계는 연호 영화(永和)를 동진 황제의 연호로 이해하죠.

그러나 『고구려사략』은 고국원왕의 연호 영화(永和)라고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또한 장수왕의 경우, 장수(長壽)는 사후의 시호로만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사략』은 장수를 연호로도 소개합니다. 장수왕은 재위80년 기간 중에 대략 20년 간격으로 연호를 바꿉니다. 건흥(建興)→장수(長壽)→연수(延壽)→연가(延嘉) 등입니다. 이 역시 새롭게 밝힌 내용입니다. 참고로 장수는 장수왕이 장수해서 붙여진 시호(또는 연호)가 아니라 불교의 무량수불(無量壽佛)을 가리킵니다.

▲ 태왕차자릉 판석. 고구려 무덤 떼 인근에서 발견된 것을 국내로 들여온 것이다. 자료제공: 정재수 작가.
▲ 태왕차자릉 판석. 고구려 무덤 떼 인근에서 발견된 것을 국내로 들여온 것이다. 자료제공: 정재수 작가.

 

기자 : 마지막으로 표지에 실은 태왕차자릉 판석에 대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재수 작가 : 태왕차자릉(太王次子陵) 판석은 이번에 최초로 공개하는 고구려의 금석문입니다. 집안의 고구려무덤떼에서 출토한 유물입니다. 판석은 화강암으로 가로 36.5cm, 세로 37.5cm, 두께 7cm로 정방형에 가깝습니다. 글자 크는 5cm 정도이며 글자 배열은 4행 3열로 모두 12자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명문은 「願太王次子陵安如川固如岳」으로 ‘원하건데 태왕차자릉이 물처럼 편안하고 뫼처럼 튼튼하소서’입니다.

그런데 태왕차자릉의 판석 명문이 태왕릉(광개토왕릉) 출토 벽돌 명문에도 동일하게 나옵니다. 태왕릉 벽돌 명문은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으로 ‘원하건데 태왕릉이 산처럼 편안하고 뫼처럼 튼튼하소서’입니다. 두 명문의 차이는 ‘태왕릉’이 ‘태왕차자릉’으로, ‘안여산(安如山)’이 ‘안여천(安如川)’으로 바뀔 뿐 기본적인 문장구조는 같습니다. 글자체는 둘 다 웅위한 고구려체입니다. 이는 태왕차자릉의 주인공이 태왕릉의 광개토왕과 같은 시기, 같은 급의 왕족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근거입니다.

기자 : 그렇다면 태왕차자는 광개토왕의 둘째아들(차자) 이겠군요?

정재수 작가 : 아닙니다. 태왕차자는 『고구려사략』에 나오는 광개토왕 담덕(談德)의 동생 용덕(勇德)입니다. 여기서의 태왕은 소수림왕을 가리킵니다. 담덕과 용덕 두 사람은 소수림왕의 왕후 천강(天罡)이 낳은 3살 터울의 동복형제입니다. 문제는 태왕차자릉 판석이 장수왕의 출생 비밀을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수왕을 낳은 광개토왕의 왕후는 평양(平陽)인데, 『고구려사략』은 평양왕후가 몰래 용덕과 사통하여 장수왕을 낳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장수왕의 실제 생부는 광개토왕 담덕이 아닌 용덕인 셈이죠.

기자 : 판석이 출토된 태왕차자릉도 특정할 수 있습니까?

정재수 작가 : 집안의 고구려무덤떼는 크게 6개 묘역으로 구분합니다. 하해방무덤떼, 우산하무덤떼, 산성하무덤떼, 만보정무덤떼, 칠성산무덤떼, 마선구무덤때 등입니다. 이 중 칠성산무덤떼에 속하는 왕릉급 무덤인 ‘칠성산871호분’이 유력합니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묘역포석(墓域鋪石)으로 사용된 판석들이 있습니다. 판석은 무덤 아래 산비탈 흙 위에 깔아 무덤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덤의 서북쪽에서 평평하게 깐 여러 개의 판석을 한꺼번에 출토하는데 태왕차자릉 판석은 이 중 하나로 추정됩니다.

특히 ‘칠성산871호분’은 개축한 흔적이 확인된 무덤입니다. 『고구려사략』에 따르면 장수왕은 훗날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어 용덕릉을 찾아가 제를 지낸 후 무덤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며 왕릉으로 격상시킨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때 판석들 중 하나에 이를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태왕차자릉 판석은 바로 장수왕의 출생에 대한 정체성의 유물이죠.

기자 : 흥미롭군요. 태왕차자릉을 입수하게 된 경위도 소개할 수 있습니까?

정재수 작가 : 현재 판석은 국내 한 소장자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공저자 이석연 변호사의 소개로 2021년 4월경 소장자의 집에서 이를 직접 보고 깊은 감흥을 받았습니다. 소장자의 전언은 40여 년 전 중국인을 통해 구입했다고 합니다. 집안의 고구려 무덤떼에서 발견된 것이라 하는데 구체적인 장소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고구려사략』 기록을 통해 출토장소를 명확히 특정할 수 있는 점은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자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정리해 주기 바랍니다.

▲ 기자와 대담하는 정재수 작가. ‘새로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의 저자.
▲ 기자와 대담하는 정재수 작가. ‘새로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의 저자.

 

'새로쓰는 광개토와 장수왕' 은 『삼국사기』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까닭에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장대한 고구려 역사의 실제 모습을 발굴하여 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 자체는 기존에 접해보지 못한 역사가 대부분입니다.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끈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새로운 역사를 좀 더 세밀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특히 집안의 고구려무덤떼를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꼭 이 책을 참고하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20여기의 주요 왕릉급 무덤에는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또한 이 자리를 빌어 강단사학과 민족사학을 하시는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삼국사기』에 매몰되어 고구려 역사를 더 이상 축소, 왜곡시키지 말고, 『고구려사략』 등 남당필사본의 기록들을 발전적으로 해석하여 고구려 역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길 기대해 봅니다.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략』 기록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그 허구를 밝혀낼 수 있습니다.

 

※본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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