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 박창화가 필사한 고구려사는 중국왕조에 조공한 적 없었다.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원왕조의 속국처럼 기록

남당 박창화가 필사해 온 고구려 사료에는 반대로 돼 있어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시리즈의 저자인 정재수 작가

『고구려사략』을 통해 광개토태왕릉비 결자탐구 및 새로운 해석

「신묘년 기사」는 열도의 왜가 아닌 한반도 부여백제의 행위라는 새로운 해석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부여백제가 야마토 왜의 원류

▲ 정재수, 이석연 저자는 고구려 역사를 새로운 사료를 근거로 반도사관과는 다른 관점으로 복원하였다. 자료: 정재수
▲ 정재수, 이석연 저자는 고구려 역사를 새로운 사료를 근거로 반도사관과는 다른 관점으로 복원하였다. 자료: 정재수

 

『고구려사략』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왜정시기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왕실도서관(서릉부)에서 필사해 온 것이다.

『삼국사기』의 약 8배 분량이다. 이러한 책이 환단고기와 마찬가지로 위서로 분류되어 우리역사연구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러한 남당유고(남당 박창화 선생이 필사해온 문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인 정재수 작가가 책을 썼다.

이 책은 『고구려사략』을 통해 광개토태왕릉비의 결자를 추적하고 길림성 고구려 무덤떼의 진짜 주인을 찾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본 저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태왕차자릉 판석을 통해 밝혀지는 장수왕의 생부 ‘용덕’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을 싣고 있다.

한 까페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자 : 안녕하세요? 이번에 이석연 前법제처장과 공저로 『새로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이란 책을 내셨는데요,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네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표지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태왕차자릉(太王次子陵)’ 명문의 판석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처음 보는 유물입니다. 특별한 사연이 있을 듯하여 내용이 궁금하군요. 우선 먼저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정재수 작가 : 잘 알다시피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입니다. 광개토왕은 정복군주의 표상이라면 장수왕은 수성군주를 대변하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두 왕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합니다. 모두 『삼국사기』가 기록을 소략한 까닭이지요. 다만 광개토왕은 《광개토왕릉비》가 존재하여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으나, 장수왕의 경우는 그저 장수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입니다.

남당유고 중에 『고구려사략』이 있습니다.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가 기록으로만 전한 고구려 역사서 『유기』의 일부로 추정됩니다. 특히 이들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내용 자체가 너무나도 방대합니다. 『삼국사기』가 소략하여 묻혀 질 수밖에 없었던 고구려의 실제 역사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기자 : 이번에 출간 하신 책은 어떻게 구성됩니까?

정재수 작가 : 책은 『고구려사략』의 방대한 기록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으니 아마도 김부식조차도 몰랐을 겁니다. 고구려의 새로운 역사발굴이라 할 수 있죠. 크게 광개토왕과 장수왕 부문으로 나눕니다. 정복군주 광개토왕과 수성군주 장수왕입니다. 광개토왕은 《광개토왕릉비》의 새로운 해석에 기반한 정복사업과 관련 유물유적이며, 장수왕은 다양한 외교에 기반한 수성사업과 관련 유물유적입니다. 특히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구려사략』 기록(원문/번역문)을 상당부분 인용하였습니다.

기자 : 남당유고는 무엇입니까? 혹시 일제강점기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필사해 왔다는 기록을 말합니까?

정재수 작가 : 그렇습니다. 남당유고는 남당필사본이라고 합니다.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 1889~1962)가 일본 왕실도서관(서릉부)의 촉탁(1924~1942)으로 있으면서 그곳에 소장된 우리 삼국시대 역사서들을 필사한 문헌입니다. 고구려는 『고구려사략』, 『고구려사초』, 『고구려사』, 『본기신편열전』 등이며(이하 『고구려사략』으로 통칭), 백제는 『백제서기』, 『백제왕기』, 신라는 『신라사초』 등이 있습니다.

기자 : 남당필사본은 위서(僞書)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떠합니까? 또한 남당필사본이 강단사학계는 물론이고 민족사학계에서도 논의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있는데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정재수 작가 : 위서(僞書)는 일반적으로 ‘조작된 사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의 조작은 서지(書誌) 즉 책 또는 문서의 형식, 체제, 성립, 전래 등의 서술이 조작된 것을 말합니다. 남당필사본은 적어도 서지를 조작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필사본을 보면 직접 필사한 내용은 검정색을 사용하였는데, 일부는 빨간색으로 각주를 단 부분이 존재합니다. 이를 두고 남당이 조작했다고 보는 것은 절대 무리지요. 물론 필사한 원본 자체가 일부 조작되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강단사학이나 민족사학으로부터 남당필사본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점은 무척 아쉽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를 들자면 필사본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널리 공개되어 알려지지 않은 점을 들 수 있지요. 특히 일본이 소장하고 있는 원본들을 하루 속히 반환받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부가 나서기 어렵다면 시민단체가 적극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기자 : 남당필사본의 『고구려사략』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까? 혹시 《광개토왕릉비》의 비문기록도 나옵니까?

정재수 작가 : 『고구려사략』은 크게 왕기(王紀)계열과 제기(帝紀)계열이 있습니다. 왕기계열은 원판본이며 제기계열은 장수왕이 황제국을 선포하며 재편찬한 개정판본으로 이해합니다. 광개토왕의 경우 제기계열의 〈영락대제기〉와 왕기계열의 〈국강호태왕기〉가 있고, 장수왕의 경우 제기계열의 〈장수대제기〉가 있습니다. 내용은 실로 방대합니다.

〈영락대제기〉에는 《광개토왕릉비》 비문의 7개 정복사업 기록이 모두 나옵니다. 어느 경우는 비문 기록보다 상세하죠. 전쟁에 참가하는 장수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거명하고 있으니까요. 〈장수대제기〉의 경우는 분량이 『삼국사기』 기록의 8배에 달합니다. 『삼국사기』가 조공(朝貢)기록에 치중한 반면 〈장수대제기〉는 조공의 반대인 래조(來朝)기록을 주로 적고 있습니다. 모두 65회가 나오며 대상은 중원왕조 뿐 아니라 한반도의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멀리 일본열도의 왜도 장수왕에게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칩니다.

기자 : 『고구려사략』 기록에 《광개토왕릉비》의 정복사업 기록도 모두 나온다니 참으로 놀랍군요. 《광개토왕릉비》는 그 연구 자체가 하나의 역사인데, 《고구려사략》을 통해 본다면 선행연구자의 해석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정재수 작가 : 《광개토왕릉비》의 비문 연구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지요. 처음 발견된 이래 백여년 이상을 한·중·일 학자들이 나름의 해석을 만들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죠. 여전히 진행형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선행연구자들의 해석도 존중합니다. 다만 그 해석이 《광개토왕릉비》의 비문기록 자체에 매몰되다 보니 자국에 유리한 부분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죠.

기자 : 혹시 《광개토왕릉비》 비문에 나오는 ‘왜(일본)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 □□, 신라를 파했다’는 소위 391년 「신묘년 기사」도 『고구려사략』에 나옵니까?

정재수 작가 : 나옵니다. 『고구려사략』〈고국양대제기〉입니다. ‘8년(391년) 신묘 4월, 이때 왜가 가야, 신라에 침입하고 백제의 남쪽에 이르렀다.(八年 辛卯 四月 時倭侵加羅至濟南)’ 여기서 가야(加)는 임나(任那)를 말합니다. 〈국강호태왕기〉에 광개토왕이 남쪽 정벌대상으로 지목한 나라가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백잔, 임나, 신라 등 3개 나라입니다. 이들은 신묘년(391년)에 왜의 신민(속국)으로 넘어가자 광개토왕이 정벌대상으로 규정하지요. 특히 왜가 바다를 건너와 파했다는(渡海波) 비문기록은 그저 침입(侵)하는 정도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자 : 그렇다면 정말로 일본열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것이 맞다고 볼 수 있군요. 그럼에도 「신묘년 기사」는 변조 논란의 중심에 있는데…

정재수 작가 : 「신묘년 기사」에 등장하는 왜는 일본열도 왜가 아닙니다. 한반도의 왜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대륙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부여세력입니다. 대륙 요서지방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한 까닭에 이들은 스스로를 ‘백제’(백가제해의 줄임말)라 불렀습니다. 저는 이들을 ‘부여백제’로 표현했습니다.

부여백제는 당시 경기도의 ‘한성백제’와는 전혀 다른 세력집단입니다. 거발성(충남 공주)을 수도로 삼고 한반도 서남부지역 일대를 장악한 충청도의 백제세력이지요. 「신묘년 기사」는 광개토왕이 병신년(396년)에 단행한 한반도 충청도 지방 정벌의 명분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때 부여백제는 광개토왕에게 처참히 깨져 일본열도로 망명하여 야마토(大倭)로 재탄생하죠(397년). 《광개토왕릉비》가 세워질 당시(414년)의 한반도 부여백제는 이미 일본열도 왜로 전환된 이후입니다. 그래서 《광개토왕릉비》, 『고구려사략』 공히 신묘년의 부여백제를 왜로 적고 있습니다.

기자 : 혹시 이 부분은 일본이 고의로 변조한 것입니까? 더구나 도해파(渡海波)를 『고구려사략』은 침(侵)으로 기록했다 하니…

정재수 작가 : 적어도 도해파(渡海波) 부분은 변조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백번 양보하여 일본이 만든 「쌍구가묵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바다를 건너다’의 ‘도해(渡海)’는 다른 해석이 요구됩니다. 일반적으로 ‘건너다’는 뜻을 가진 한자는 渡(건널 도)와 濟(건널 제)가 있습니다. 渡는 강이나 하천 등 소규모 물을 건널 때 사용하지만(渡江/渡河), 濟는 바다와 같은 대규모 물을 건널 때 사용합니다(濟海).

한자의 용례로만 본다면 왜는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내의 어떤 강을 건널 수도 있고 또한 한반도 남해 연안을 따라 건너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渡海의 대상을 일본열도의 왜로 고정시키는 것은 크나큰 오류입니다. 당시 왜는 분명히 한반도에 존재합니다.

「신묘년 기사」의 기존 해석은 당시의 한반도 부여백제를 이후의 일본열도 왜로 잘못 인식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이지요. 이는 일본이 우리 역사에 채운 족쇄가 아닙니다. 우리 역사가 일본에 채운 족쇄라 할 수 있지요. 일본은 「신묘년 기사」로 인해 “만세일계 천황가”의 출발이 한반도임을 자신들도 모르게 스스로 인정한 꼴입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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