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단순하고 소리를 일관성있게 표현하는 한글과 견줄 수 있는 문자는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

기사수정: 서기2016.7.28. 12:50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중요한 줄도 모르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한국어는 대중 연설 언어로써 영어보다 우수하다, 훈민정음의 글들은 음성학의 법칙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

“만약에 한민족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자신들의 새로운 소리글자 체계인 한글을 받아들였다면 한민족에게 무한한 축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데 너무 늦었다는 법은 없다.”

 

중국과 일본도 한글을 써야 한다? 지금 이런 말을 들으면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뭐라고 할까, 우리를 미개인 취급하며 종, 노예로 여겨온 중국, 우리를 영원히 왜구로 흡수해 버리려고 했던 일본, 이들이 오늘날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대체 우리 훈민정음, 한글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는가,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지난7월 26일 서울 종로 와이엠씨에이(YMCA)에서 소중화 조선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미국의 한 선교사의 일대기를 다룬 서적 출판 설명회가 있었다. 이 선교사가 남긴 무수한 글을 주제별로 정리하여 내놓았다. 이 선교사의 활동과 한국 사랑의 여정을 수십 년간 추적, 연구해온 김동진 회장은 이 선교사를 ‘초인超人’과 같은 인물로 소개하였다. 그는 선교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인물이라고 하면서 선교사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교사로 불리지 말기를 바라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 국사책에도 한번 쯤 등장했을 법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알려진 ‘육영공원’을 설립한 인물로 우리 근대사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한국을 다른 어느 외국인 보다 뜨겁게 사랑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기를 원했고, 서기1949년 7월 1일 86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왔다. 자기 조국이 아닌 태평양 건너 이역만리 이념대립으로 첨예한 땅, 한국을 찾았다. 비록 이승만이 광복절 행사 국빈으로 초청을 하여 왔지만 그는 소원을 이루었다. 미국을 떠 난지 1주 일만에 한국에 도착한 그는 여독으로 도착한지 일주일만인 그해 8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금 한강변 양화진에 묻혀 있다. 식민지조선을 뒤로 하고 일제에게 강제 추방 된지, 40년 만에 광복된 한국을 찾은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로 알알이 맺혔다. 조선의 아름다운 산하, 생민들의 높은 정신능력, 수준 높은 사상과 철학에 푹 빠져 조선을 연구하고 세계에 알리며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을 도와 스스로 서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이 사람이 헐버트(Hulbert)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은 이날, 출간한 책,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헐버트의 활동과 한국에 대한 그의 기여를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그는 먼저 헐버트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헐버트가 한국에 온 것은 선교사라기보다는 고종의 초청으로 교육자의 신분으로 왔음을 강조하였다. 이어 헐버트는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어문학자, 역사가, 언론인이었다고 하였다. 특히 헐버트는 우리 나라 최초 우리의 말글인 한글을 전 생민이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으로 꼽았다. 또한 우리의 문학, 예술, 음악, 역사를 누구보다도 깊이 탐구하고 연구하여 수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는 점에서 한국학을 처음 개척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김동진선생이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책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날 설명회에서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가 우리나라에 기여한 것에 비하여, 너무나 알려지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 날, 한국방송, 와이티엔(YTN), 문화일보 등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하였다.

또한 단순히 미국의 감리교인 기독교를 심을 목적으로 활동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그런 목적 앞서 헐버트는 한국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당시 한국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지식층과 지배세력에게 근대사상을 고취 시켜 제국주의 침략세력에게 소멸되지 않고 스스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매진한 선구자로 보았다. 특히 헐버트가 한국인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헐버트가 순 한글로 제작한 <사민필지>라는 책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당시 지식층과 지배세력의 눈을 뜨게 하는 안내서와 같다고 하였다. 세계역사지리서라고 할 수 있다. 책 안에는 이해를 돕기 위해 해당 주제마다 지도를 그려 놓았다.

또한 헐버트는 15년간을 연구한 끝에 <한국사>를 내놓기도 하였다. 헐버트는 우리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전문가 수준의 연구서와 논문들을 쏟아 냈다. 별도로 헐버트 학과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수많은 저작물을 남겨 놓았다. 그는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인 같은 눈으로 우리의 실체를 꿰뚫었다. 특히 그는 우리의 판소리에서 풍겨 나오는 혼을 정확하게 읽고 서양의 어떤 소설보다 우수하고 아름답다고 찬탄하였다. 판소리에는 춤과 노래, 이야기 그리고 장단이 있다는 것을 갈파하고 우리 가락의 섬세함에 깊이 빠졌다. 그는 아마도 서양 장단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삼분박, 삼박자 장단의 오묘함에 매료된 듯하다.

헐버트의 어록을 통해서 당시 우리 생민들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어느 민족도 봄의 풋풋함을 조선인들보다 더 만끽하지 못한다. 어느 민족도 조선인들만큼 언덕위에 앉아 아지랭이로 반쯤 가려진 환상적인 가을 풍경을 열정적으로 즐기기 못한다(서기1897.<조선의 예술>).”, “광대의 숙련된 동작과 음조가 소설을 읽을 때는 느낄 수 없는 연극적 요소를 더해 주기에, 광대의 이야기 풀기(판소리)는 예술성에서 서양소설을 훨씬 능가한다(서기1902.<조선의 소설>).” 헐버트는 아리랑을 최초로 기록하여 아리랑에 담긴 역사성과 혼을 읽었고, 한국인은 아리랑을 부르면 시인되고 한국인에게는 아리랑이 한국인의 가장 귀한 음식, 쌀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으며, 아리랑은 우리의 영원한 노래가 될 것이라고 까지 하였다.

앞서 헐버트가 ‘중국과 일본이 한글을 도입하여야 한다’고 했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헐버트는 서기1913년을 전후하여 당시 청나라 중국 정부에게 한글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글자 체계를 도입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 후손이 보존해온 신문지에 나와 있는데 이 신문은 당시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Springfild)시에서 발행한 <리퍼블리컨 THE Republican>지에 기고된 것으로 추정한다. 헐버트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당시 중국정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중국의 실권자는 원세계(위안스카이)이였는데 그 이전에 헐버트가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원세계도 우리나라에 와 있었다. 이 때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었고 원세계가 중국의 사실상 주인이 된 시기에 한글사용제안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원세계는 지나족, 손문의 ‘신해반란’으로 권력을 상실한다.

한편 일본도 한글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은 그의 자전적 회고록인 <헐버트 문서>에 등장한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한글을 200개가 넘는 세계 여러 나라 문자와 비교해보았지만, 한글과 견줄 문자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글은 배운지 4일이면 한글로 쓰인 어떤 책도 읽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일본도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한글과 관련하여 주시경 선생도 헐버트의 문하에 있었으며, 백암 박은식, 단채 신채호도 직간접적으로 헐버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사민필지>의 서문. 헐버트는 <사민필지>를 통해서 당시 우리 생민들이 근대적 사고와 제도 도입을 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서양과 같이 선진국으로 나아가기를 바랬다. '사민필지'는 '士民必知' 라고 하여 지배층과 생민 등 신분을 가리지 말고 전 생민들이 모두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을 만큼 서양식 근대화를 안내하는 지침서다.

이외에 헐버트의 활동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른바 ‘고종의 비자금’ 사건이다. 김동진 회장은 이 부분에 대하여 개략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고종은 우리나라가 망해가자 육영공원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헐버트에게 자신이 상해에 숨겨둔 비자금을 찾아서 무기와 독립자금으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찾으려고 보니 이미 일본이 찾아간 뒤였다. 원래 독일은행이 관리하였는데 처음에는 독일은행 측에서 고종의 친서가 아니라서 지급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서류 위조와 압박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김회장이 이 비자금 경로를 추적해 보니 당시 조선통감부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고, 관련 서류에 다른 것은 모두 지워진 채 남아 있고, 매국역적, 친일파 이완용에게 주었다는 식의 기록만 남겨져 있다고 하였다. 이등박문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고종의 비자금은 당시 미화로 15만불이라고 하였다. 김회장은 이 자금의 최종 기착지를 밝혀내어 일본에게 반환을 청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김회장은 이 비자금의 성격에 대하여는 애초에 독립운동자금으로 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예치된 것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김회장은 앞으로 아직도 공개하지 않은 헐버트 문서가 수없이 쌓여 있다면서, 계속하여 출간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헐버트에 대하여 잘 못 알려진 부분을 해소하고, 헐버트의 한국에 대한 업적을 계속하여 알려 나가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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