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같지 않은 '연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과 광주과학기술원 원장을 역임한 허성관의 역사 답사를 연재합니다. 허성관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연구하며, 그들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틈나는 대로 역사 답사를 하고 있습니다. 은퇴후 역사연구를 하는 허성관의 역사답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연변 조선족 자치주 주도인 연길(延吉)에서 시작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 신의주 대안의 단동(丹東)까지 강 건너편의 만주지역과, 요동반도 끝에 있는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답사하는 것이 이번 역사답사 일정이다. 결과적으로 동간도 또는 북간도로 알려진 두만강 건너와 서간도인 압록강 건너를 답사하기 때문에 백두산 천지에도 오르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우리 상고사의 자취와 피어린 독립투쟁의 현장을 답사한다. 요동반도 끝은 안중근 의사, 이회영, 신채호 선생 등 선열들이 순국하신 곳이자, 그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이번 답사는 24명이 함께했다. 기간은 2015년 7월20일부터 27일까지 7박 8일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연길(1박)→도문→용정→화룡→이도백하(2박)→통화(3박)→유하현→집안(4박)→환인(5박)→단동(6박)→대련(7박)이다. 답사 기간 동안 버스로 달려야 하는 거리가 약 3,500km 정도이다. 연길 도문, 용정, 화룡에서는 애국지사들의 독립투쟁의 현장을 답사할 것이다. 특히 화룡 지역에는 대종교 3종사 묘가 있고 청산리 전투의 현장이 있다. 이도백하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거점이다. 통화시 유하현에는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집안과 환인은 고구려 역사의 현장이다. 단동은 북한의 신의주 대안에 있고 이 곳 부터 북쪽으로 고구려 2차 방어선의 거점이던 산성들이 줄지어 있다. 대련에서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것이다.

연길-대련 답사지도 <사진-허성관>

        
                                
① 7월20일(월) 인천공항 → 연길
   ― 남의 나라 같지 않다

네 번째 역사 답사 여행이다. 장기 여행에는 항상 챙겨가야 할 물건들이 많다. 차근차근 준비했는데도 빠뜨린 게 있을까 걱정이다. 특히, 나이 들어 매일 먹어야 하는 약에 각별히 신경 썼다. 아침 7시까지 인천공항에 집합하기로 했는데 새벽에 여권 잊지 말고 시간 엄수하시라는 문자가 왔다. 행사진행을 하는 실장의 책임감이란 참 무서운가 보다.

인천공항에서 연길까지 비행시간이 2시간이 걸린다. 북한 상공을 경유한다면 1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요동반도를 경유해서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을 따라 올라가기 때문에 1시간이 더 걸린다. 지난번 백두산 근처를 지날 때 날씨가 맑아 장엄한 장백산맥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혹시나 창가 좌석이어서 백두산 산록을 내려다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흐린 날씨여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길이 가까워 오자 거대한 산맥이 잠깐 보이다가 현지시간(한국 보다 1시간 늦음)으로 11시 정각에 연길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국제공항이라고는 하나 한적한 시골 공항이다. 어이없게도 비행기 안에서 15분 기다리다 내렸다. 이유를 묻지 않는 게 중국 여행에서는 오히려 편하다고 한다.

연길시 주위는 낮은 곳은 논, 물을 댈 수 없는 약간 높은 곳과 산비탈은 옥수수와 콩밭이다. 연길시는 동서로 터져 있고 남북이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막혀 있는 분지다. 남향받이 산기슭에서부터 평지까지 동서로 도시가 가지런하게 형성되어 있다. 마치 신도시 같다. 고층 건물들도 꼭대기 지붕은 조선식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조선족 자치주로서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놀랍게도 시내가 매우 깨끗하다. 조선족의 위생 관념이 높은 결과라고 한다. 오늘 밤 묵기로 되어 있는 연길연변국제반점 뒤에 「뿌얼하툰」이라는 강이 시내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른다. 여진족 말로 ‘버드나무 숲’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문 이름은 없다는 강이다. 한족이 놀던 땅이 아닌 증거다. 아담한 다리도 3개가 놓여 있다. 강폭은 한강의 3분지1 쯤 되는 것 같다. 수량이 많은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보를 막은 것 같다. 녹조가 없는지 은근히 걱정된다.
          

강에 맞닿은 연변 시가 풍경 <사진-허성관>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5년 12월 발족했는데 길림성 동남부 광대한 지역이다. 자치주에는 연길, 도문, 돈화, 용정, 화룡, 혼춘 6개 시와 왕청현과 안도현 2개 현이 있다. 인구가 250만, 면적이 4만km²라고 한다. 우리나라 1개 도 정도 크기라고 생각했던 필자는 깜짝 놀랐다. 우리 남한 면적이 9만km² 조금 넘으니 말이다. 남한의 거의 반이나 되고, 게다가 인구가 250만에 불과하니. 조선족 인구가 40%를 넘는다고 한다. 연길시 인구는 지금 50만이 넘고 60%가 조선족이라고 하나 지금은 이 비율이 많이 줄었을 것이다.

이곳 연변은 과거 동간도 또는 북간도로 불리던 지역이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무대다. 이 소설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 필자의 간도에 관한 현지 지식의 전부이다. 만주국 시기 이곳은 간도성이었다.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에 조선 백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두만강을 넘고,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애국지사들이 자리 잡고 개척한 땅이 이곳이다. 거리의 간판과 안내판은 한글과 한문으로 쓰여 있다. 참으로 익숙하고 편한 거리다.

간민회 본부가 있었던 당시 연변도윤의 공관 <사진-허성관>

먼저 ‘간민회(墾民會)’ 본부가 있던 곳을 찾았다. 연길 시청 건너편이다. 간민회는 1913년 북간도에서 최초로 조직된 조선인 자치조직이다. 간민회는 조선인들이 중국의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중국 국적 취득을 주선하고, 토지매매 등 경제 활동 지원, 조선인 교육 등에 진력했다. 이동춘, 김약연, 김립 등이 주도해서 조직되었다. 당시 이 지역 행정을 관장하던 중국인 관리 연길도윤(오늘날 연길 시장에 해당)이 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이어서 간민회 본부가 그의 공관에 있었다. 이 건물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잘 보존되어 있었다. 간민회는 1920년 ‘대한국민회’로 발전하고 북간도 지역 독립항쟁 단체의 근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간도에서 조직된 ‘경학사(耕學社)’와 함께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간 자치를 실행하여 민주공화정의 씨앗이 된 조직이다. 우리에게는 민족수난기에 새로운 희망이 움튼 곳이다. 잘 보존해준 연길 당국자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길에 서(西)시장이 있다. 우리 동포 조선족들의 전통 시장이다. 규모가 큰 우리 재래시장이고 없는 게 없는 듯하다. 물론 상인들은 전부 조선족이다. 건어물 가게 숫자가 제일 많다. 북한산 말린 명태인 북어가 이 시장 명품이다. 요즈음 한국 호프집에서 짝태와 먹태 등이 인기인데 모두 밀린 명태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북어가 이곳 서시장의 북어란다, 어떤 가게 북어가 특히 좋은지 연변대학 교수에게 물어 제법 많이 샀다. 내일 봉오동 전투 전적지, 대종교 3종사 묘, 청산리 전투 전적지에서 간소하게 지낼 제사에 이 북어를 제수로 올릴 것이다. 역시 맛이 일품이었다.

서시장 상인 아주머니에게 냉면 잘하는 집이 어디냐고 물어 진달래식당에서 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육수 맛이 좀 색다르지만 시원하고 좋았다. 그러나 양이 너무 많아 먹기도 전에 질린다. 남길 수밖에 없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 옆 가게는 혼수품 가게인데 웨딩드레스로 한복과 서양식이 같이 전시되어 있다. 새삼 '여기가 중국이구나'. 잠시 혼란스럽다.

연변 서시장 입구 <사진-허성관>

서시장을 둘러본 다음 오늘 밤 숙소인 연길연변국제반점(延吉延邊國制飯店)에 여장을 풀었다. 5성급 호텔이다. 2012년 까지만 해도 답사 여행에서 숙소는 3성급을 넘지 않았다. 장급이나 여인숙에서 지내는 게 보통이었다. 지난해 북만주 답사 때도 네 밤을 장급 호텔에서 잤다. 그저 편히 샤워할 수 있으면 만족했다. 이번 답사에는 4성과 5성급 호텔이다. 그 만큼 살기 좋아진 탓일 것이다.

계획한대로 호텔에서 연변대학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공동학술대회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개최되었다. 학술대회의 주제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역사 – 이념을 넘어서‘였다. 연변대학의 김태국, 이용식 교수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이덕일, 김병기 박사가 논문을 발표하고, 리광평 전 용정 문화관장이 ’일제 침략 최상 및 조선족 피해자 사진‘을 설명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만주지역에서 대일항쟁은 한국인과 중국인의 공동 투쟁이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인은 한국인의 공적을 크게 인정하고 있으며, 이런 인식이 오늘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있게 하는 바탕'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의 대일 투쟁은 194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고 그 중심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침략사관 재등장과 한⋅중의 대응‘을 발표한 이덕일 소장은 간도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주권과 영토주권을 분리하여 논의하는 것이 두 나라 모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필자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국민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상대국이 영사관 설치를 허가해 주는데 일제가 만주를 침략해 들어갈 때 일본인이 별로 없는 지역에 어떻게 영사관을 설치해서 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느냐 하는 점이였다. 일제는 바로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했고 조선인을 만주에서 자국민으로 주장해서 영사관을 설치한 것이다. 만주에서도 일제가 조선인을 강제로 군대에 징집했다는 사실이다. 일본군 성노예 시설이 동남아 뿐만 아니라 만주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혼춘에 대대적인 일본군 성노예 시설이 있었다. 리광평 선생은 강제징집과 성노예 관련 슬픈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최근 수년 동안 ‘소수민족모범단결집단’으로 중국 정부가 선정하였고, 그 보상으로 대대적인 투자예산이 배정되고 있다고 한다. 김태국 교수는 조선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조선족 대학인 연변대학은 중국 100대 대학에 들어간다고 한다. 중국에 얼마나 대학이 많은가! 한국 사람이 세운 중국의 새로운 명문 대학인 연변과학기술대학도 이곳에 있다. 필자와도 조금 관련이 있는 대학이다.

답사 첫날이고 학술회의 중국 측 참가자들도 있어서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이 입에 맞았다. 거리의 간판이 한글로 되어 있고, 자나가는 행인들의 대화에서 우리말을 들을 수 있고, 음식도 입에 맡고, 산하(山河)의 풍광도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고 가는 것도 불편하지 않다. 조그만 시골 이곳 공항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가 정기적으로 뜨고 있다. 남의 나라 같지 않다.
저녁식사 후 양고기 꼬치와 맥주로 야외에서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고자 했으나 다른 중국의 도시와는 달리 이곳에는 거리 주점이 없다. 전에는 강변에 노점 꼬치집이 있었다고 한다. 시 당국이 얼마 전부터 노점상을 일체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가 정갈할 뿐만 아니라 고즈넉하다.

꼭 우리가 다스려야 우리 땅인가. 우리 숫자가 많고, 오고감이 자유스럽고, 불편이 없으면 우리 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은퇴한 박정신 교수와 둘이서 한국의 은퇴자들을 이곳에 유치하는 사업을 해보자며 허허 웃었다.  (계속)

 

글⋅사진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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