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국신화는 신화형태로 쓴 역사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가야개국신화 부정하는 강단 식민사학계와 국립중앙박물관

가야개국신화는 어떻게 나라를 세웠는지 상징적으로 전해

이광수는 부정적 근거만 채택해 가야개국신화 가짜로 몰아

 

 

▲ 가야시조 김수로와 허황옥. 김산호 그림

 

가야 건국신화 4-1

 

다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 있는 허왕후 설화를 들어보자.

(서기 48년) 9간 등이 대왕의 배필을 정하자고 하니 수로는 '나는 하늘의 명령으로 왔으니 왕후도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라 하고, 유천간은 망산도에서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은 승점으로 가게 했다.

(대폭 생략)

침전에 든 왕후가 '자신은 아유타국 공주로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이라 하고, 아비 어미의 꿈에 상제가 나타나 '가락국 시조 수로는 하늘이 보낸 왕이니 공주를 보내 배필을 삼게 하라'고 하여 여기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건국신화는 신화와 역사적 사실이 뒤섞여 있어, 역사적 사실의 진위를 가지고 여러 논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도를 방문했을 때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허왕후 이야기를 들어 인도와 우리나라의 인연이 2천 년이나 된다고 했다는데, 주류 강단사학계는 삼국유사 허왕후 이야기는 허구라고 주장한다.

강단사학계 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마저 불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가야가 서기 42년에 나라를 세우고 48년에 허황옥을 왕후로 맞이하였다는 삼국유사 기록은 전혀 믿을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9년 12월 3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야본성'이라는 좋은 전시가 있었다.

그런데 전시가 열리자마자 조선일보와 한겨레 신문이 '검증 안 된 유물'을 전시했다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흙으로 만든 방울과 이른바 파사석탑이 주 타겟이었다.

토제방울은 가야 건국신화 내용을 증명하는 유물이었고, 파사석탑은 허왕후의 존재와 불교 전래를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이었다.

결국 박물관측은 토제방울은 치워 버렸고 파사석탑은 '신화'라는 설명을 붙여 '검증 안된 유물'임을 인정한 셈이 되었는데, 가야 건국 42년이나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48년에 가야로 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신화적 사실이 되고 만 셈이다.

그뿐인가?

'가야본성'전은 기본적으로 일본 극우 세력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선전장이라는 비판도 거세게 나왔다.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야마토 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인데, 거꾸로 야마토 왜가 가야를 점령하여 임나를 설치했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전시라는 비판이었다.

처음에는 국내 전시 이후에 일본 순회 전시까지 할 계획이었다는데, 부산 전시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건국신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으로 만만치 않다.

이광수는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에서 허왕후 신화의 허구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요약해 보겠다.

[ 허황옥의 나라인 아유타라는 도시가 고대 인도에 존재한 것은 5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 사이다.

아유타 곧 아요디야는 라마야나의 성도로서 당시 꼬샬라의 수도인 '사께따'를 모델로 만들어진 '가상의 도시'였다.

굽타 말기인 5~6세기 경에는 몰락한 사께따를 실제 아요디야로 부르게 되었다. 허왕후가 왔다는 서기 48년에는 아유타나 아요디야라는 도시도 나라도 없었다.

석탑은 원래 기이한 돌을 숭배하던 김해지역 풍습으로 만들어진 돌무지였는데, 허왕후 설화에 결합되어 파사석탑이 되었을 것이다.

허왕후가 출발했다는 기원 초기에 고대 인도에는 불탑이라고 부를만한 돌탑은 없었다.

허왕후의 역사적 실체화는 조선조 양반 가문정치의 산물이다.

조선에서 상당히 지체 높은 가문으로 자리 잡은 양천허씨가 허왕후를 역사화하기 시작하면서, 허왕후를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지냈다'는 '가락국기'의 기록을 근거로 그 근처에 있던 무덤 하나가 허왕후릉이 된 것이다.

1671년 허목이 쓴 '양천허씨족보 序'에는양천허씨의 시조는 허왕후가 아니라 고려 개국공신 허선문으로 나온다.

이에 따라 허왕후는 왕릉의 비문에는 시조로 나오지만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한다.

현재 양천허씨의 족보에 기록된 공식적인 시조는 허선문인데, 그를 허왕후의 30대 손이라 설명해 놓았다.

허왕후가 아들 열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조선 인조 때 송인의 <이암집>에 처음 나타난다. 등등. ]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나오는 허왕후 설화 등을 참으로 갈갈이 찢어버린 셈이다.

그러나 이덕일 등은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래서 건국신화를 쓰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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