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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894년 왜군의 경복궁 침탈은 갑오왜란동학 혁명사 조차도 일제치하 일제의 역사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손윤 | 승인 2021.01.27 23:08

 

글: 손윤(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동학혁명사 바로잡기 3

 

해월 최시형이

보은 동학군 북접대소 산하 포와 접주들에게 총 기포령 하달

전봉준의 봉기와 전북 정읍 황토현 전투 승리도 기포령에 따른 것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동학군 전투상황 나오는데 사료가치 높아

동학혁명에 대한 왜곡이 보이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일제의 입김 때문

 

▲ 오른 쪽이 해월 최시형, 왼쪽이 의암 손병희 선생. 이 두 인물은 한국 근현대사에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해월은 1894년 일제가 경복궁을 침탈하여 고종을 사로잡아 갑오왜란을 일으키자 대일 동학의병전쟁을 선포하고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전쟁을 벌여 민족 자존심을 세웠다. 의암은 서기 1919년 3월 만세 혁명을 동학을 바탕에 깔고 일으킴으로써 민족의 저력을 세계에 보여 줬다. 근대사의 중심이며 향후 항일무장투쟁과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문을 열었다.

4. 무장기포는 최시형의 1차 기포명령

백범일지 상에서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가 벌써 난을 일으켰다.”라는 김낙철(부안 대접주)의 보고가 들어왔다는 사실로도, 무장의 손화중 포(산하 전봉준 접주)와 북접대도소 지휘부는 교감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고부 봉기 보고와 금산지역에서 동학교도가 살육을 당하고 있다는 잇단 보고받고 난 최시형은, “호랑이가 몰려들어 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라는 전 동학군 동원령을 북접대도소 산하 포, 접주들에게 명령한 사실이 북접의 공식적인 제1차 총 기포령이다.

황토현(정읍) 전투지역에서 호남지역 동학군이 아닌 무수한 전국적인 다른 지역 동학군 유골이 나오는 것만 해도 이를 입증하고 남는다.

제1차 기포령 전후와 동학혁명의 과정을 서술하면,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최시형으로부터 접주 첩지를 받은 전봉준이 이후 북접대도주 최시형의 묵인 또는 지휘 하에 1894년 3월 10일(양력 4.15) 고부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보고를 받은 북접의 최고지도자 최시형이 직접 군사행동을 검토했다. 이어 보고를 받은 동학군 살육에 대한 사건 내용은 1894년 3월 8일~12일인데 이는 양력으로 4.13~17. 이다.

금산기포 전후\ 의 상황과 일치한다. 동학 지도부는 이를 종합하여 1894년 3월 20일(양력 4.25)을 기해 전국의 동학군에게 첫 기포 명령인 동원령을 내렸다.

이토록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현장에 있었던 김구의 『백범일지』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대부분의 동학사 연구자들은 계사년 가을에 경통을 받았다는 김구의 『백범일지』상의 해가 계사년이 아닌 ‘갑오년의 착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상식적으로 보아도 1893년 가을에 보은 장안의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지역의 동학군 명부를 북접대도소에 보고하라는 경통을 받았고 황해도 지도자 15명에 뽑힌 점, 수로와 육로를 거쳐서 김구 일행이 보은 장내리(장안)에 도착한 점, 최시형이 동저리리 차림이라고 묘사한 점, 갑오년(1894) 3월 전후의 동학군 기포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사실과 다르다.

더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를 년도를 착오나 하는 수준의 저급한 수준으로 깎아내려 자질과 인격까지 욕되게 하는 행위이다.

김구가 북접대도소에 도착한 시기는 계사년(1893) 가을에 경통을 받고 준비하여 최소한 갑오년(1894년) 초에 북접대도소에 도착한 것으로 동학혁명사를 바로 써야 맞다.

최시형이 옥천 청산 문암리 도소에 강석(講席)을 연 때가 1894년 1월 5일(음력) 이후 인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구 일행이 최시형이 강석을 펼치고 있었던 시기에 도착하여, 명부를 보고하고 인사를 올리고 첩지를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북접대도주 최시형의 첫 동원령에 따라 3월 8일 이미 금산에서 기포한 북접대도소 동학군의 친위부대와(조재벽, 서장옥 등) 동시에 3월 10일 고부에서 봉기하여 실패한 전봉준 부대(300명)가 무장의 손화중 부대(4,000명)의 지원을 요청하여 전 동학군이 함께 무장에서 기표(3월 21일, 양력 4.26)했다.

이를 시작으로 백산에서 기표(3월 26일, 양력 5.1)하고 총력을 기울여 황토현 전투(4월 7일, 양력 5.11)에서 관군에게 대승리를 거두는 등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점령(5월 7일, 양력 6.11)하는 것이다.

이후 육임제의 소산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한동안 호남 전 지역을 동학군이 통치를 하게 되는 과정을 제1차 동학혁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 청산기포는 최시형의 제2차 기포명령

최시형은 일본 정규군이 동학군을 살육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자, 1894년 9월 18일(양력 10월 16일) 손병희에게 북접 통령 지휘기를 내려 전 동학 혁명군의 지휘봉을 맡기면서 제2차 동학혁명 및 대일항쟁을 시작한다.

이때 최시형은 두 번째 통문인 초유문(招諭文)에서 1차 총기포 명령(1894.3.20.)에 이은 제2차 출정이라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천도교 측의 자료인 ‘천도교회약사’, ‘천도교창건사’를 비롯한 일제강점기간에 출판한 자료 및 문헌의 무비판적인 인용과 일부 역사학자들의 잘못된 인식 하의 연구에서 1894년 9월 18일을 최시형이 첫 기포(제1차)했다고 총 기포령을 내린 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동학혁명의 위대한 역사를 보는 대한민국 국가 차원의 민족정기 선양·고취의 관점에서 크나큰 오류이며 희생된 수십만 이상의 동학 선열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시급히 수정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된 지 75년 이상 지나도록, 기본적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1894년 6월 21일 자정에 경복궁을 기습 침략하여 조선의 고종황제를 인질로 잡아, 본격적으로 동학군 살육 작전을 벌인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항일전쟁을 수행한 과정을 제2차 동학혁명이라고 정의함이 맞다.

남북 분단으로 연구 자료가 절대 부족하여 1894년 10월에 시작한 김구 등이 선봉장으로 나선 해주성 전투와 이를 지휘하여 3개월 이상 해주성을 지킨 위대한 임유현 포접주를 비롯한 북조선 지역에서의 동학군이 대일전쟁을 치른 역사는 아직 전모조차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시지탄이지만 2019년 동학농민혁명 일로 정한 5월 11일은 3·1혁명으로 탄생한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의 국가기념일로 정해 다행이다.

이에 순응하여 동학혁명으로 순국한 위대한 우리의 선열들을 기리는 뜻에 더하여 남과 북이 함께했던 한·일 전쟁의 역사, 위대한 동학 혁명사를 바르게 고쳐 써서 후학과 국민에게 남겨주는 일이 우리의 의무다().

손윤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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