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역사를 바로 잡아야 민족이 살고 통일을 한다.

글: 손윤(의암 손병희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

 

 

동학혁명사 바로잡기 1

북접은 동학교단 및 동학군 지휘부를 뜻하는 용어로 정의해야

일제침략은 서기 1895년  동학혁명 실패 후 서기 1945년까지 

동학혁명시 전봉준과 '남접'과 최시형의 북접 대립구도는 잘못

전봉준은 처음부터 최시형의 지령하에 혁명군을 이끌어

왜곡된 동학혁명사는 일제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져

 

▲ 서기1894년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갖고 있던 화승총(좌), 우측은 당시 일본군이 무장한 캐틀링 기관포.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방적인 일본군의 학살만이 있었다.

북접의 정체성 확립과 남접 인정의 오류

동학혁명에서 남접의 실체는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북접대도소를 설치하고 북접대도주인 최시형의 지휘하에 동학혁명이 시작되었고, 최시형이 관군과 일본군에 잡혀서 1898.6.1. 종로3가 단성사 입구(육군형무소)에서 교형을 받음으로써 동학혁명은 끝났으며, 당시 조선은 나라를 일본에게 송두리째 빼앗기고, 일본군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강연 등을 통해서, 1895년 동학혁명이 실패한 후 일제 치하에서 50년 간 조선이 식민통치로 핍박을 받다가 1945년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일제 36년 이라는 통설은 정사(正史)에 맞지 않는 과거형이다.

외세가 물밀 듯이 들어왔던 19세기 말, 우리나라 백성에게 민주주의를 심어 준 동학혁명의 위대한 역사를 살필 때마다, 일반화 되어 있는 북접의 최시형과 남접의 서장옥 또는 전봉준이 대립관계에 있었다는 북접 대 남접의 대립 론에 대하여 거짓임을 밝혀왔다.

또 동학혁명을 주도하였던 천도교의 동학혁명역사 서술에서 조차, 최시형의 최 측근으로 활약한 서장옥2의 존재를 도외시 한 채, 전봉준을 최시형과 대립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무지(無知)에서 나온 것이며, 나라를 잃는 한민족의 피 맺힌 역사를 왜곡한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과 우리의 사대근성이었음을 연구·조사하여 바로잡고자 한다.

아무런 역사적인 사실근거 또는 1차 사료에 의하지 않은 채, 서장옥은 남접의 영수 또는 서포를 이끈 동학대접주라는 도식과, 전봉준이 남접의 실질적인 수령이라는 통설도 엉터리라고 본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7일 일본영사의 심문(4차 공초, 1차 사료)에서, “모든 접주는 최법헌이 차출한다.”, “나도 최시형이 차출했다.”고 답함으로써, 정봉준 자신이 북접대도주 또는 북접법헌 최시형 휘하의 일개 접주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어 “호남과 호서 전부 최가 차출했다.”고 명확하게 답했다.

동학혁명 당시 서장옥 또는 전봉준이 호남 및 호서를 지휘하는 남접의 영수 또는 수령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일본 영사관의 공초기록에서 조차, 남접의 실체는 없었으니. 누군가 후에 조작한 역사다.

서장옥은 서인주(徐仁周)의 다른 이름으로 최시형의 최측근이며, 최시형의 아들 최덕기와 서장옥은 동서지간이기 때문에 최시형과 대립, 경쟁관계에 있을 처지도 안 된다.

1887.1.15.일, 최시형의 아들 최덕기가 청주, 율봉에 사는 음선장의 둘째딸과 결혼하였으며, 음선장의 첫째 딸은 이미 서장옥과 결혼을 했으니 사돈관계이기도 하다.

서장옥은 나이(1853년생)로 보나,1882년 손병희(1861년생), 여규신(여운형의 조부) 등과 청년시절에 최시형에게 입도식을 치른, 북접에서의 위치는 수십 명에 달하는 대접주 중 1인으로 최시형의 측근으로 늘 선봉에 섰을 뿐이다.

1894년 9월 18일 북접통령으로 선임되는 손병희도 최시형의 수제자이자, 충의포 대접주임을 견주어 보면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북접에 대항하였다는 남접의 존재와 관련한 시비는 동학교단의 정체성과 동학혁명사에서 최고지도자 최시형의 군권과 지도력에 상처를 입히고, 왜곡하고자 하는 일제 식민사관을 쫓는 부류의 농간 또는 이에 편승한 일부 역사학자의 연구오류로 보아야 한다.

손병희는 북접대도주 최시형이 1898년 4월 5일 원주에서 체포되기 직전인1897.12.24. 북접대도주의 직위를 계승한 후, ‘북접법대도주’로서 동학교단을 이끌었다.

1905.12.1.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할 때까지 북접법대도주 인장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손병희의 후계자인 박인호가 1908년 2월 18일 천도교 대도주를 계승한 사실에 비추어 봐도 북접은 동학교단 및 동학군 지휘부를 뜻하는 용어로 정의해야 한다.

따라서 북접에 있지도 않았던 남접을 비교, 대칭하게 하여 위대한 동학(북접)의 개벽정신을 흐리게 하고 동학혁명군이 마치 상하 간 내부적으로 분열하여 우리끼리 싸운 오합지졸처럼 묘사하고 호도하는 역사 왜곡은 시정하여야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학자들의 사료에서 조차, ‘동학당 살육 작전’대상’으로 삼았던 동학혁명군을 빗대어 조선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엉터리로 친일학자를 앞세워서 거짓으로 그린 일제 군국주의와 아직도 무지한 우리의 식민사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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