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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 학자들의 단군 난도질 현장일제의 단군 난도질은 배달겨레를 말하려는 신호탄이었다.
김상윤 | 승인 2020.10.08 18:00

 

글: 김상윤(사단법인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

 

 

실증주의와 사료비판 교차검증을 주장하는 자들의 민낯

상상과 추론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단군을 전설이라고 해

고조선기 고구려 벽화 무시하고 단군 역사 축소 깎아내려

오다 쇼고는 단군조선이 몽골침략에 반발에서 나왔다 주장

일인 학자들의 단군 말살에 치열하게 반박한 육당 최남선

 

▲일제의 일인식민사학자들이 하나같이 단군을 깎아내리고 역사가 아닌 전설이라고 매도했다. 위 책은 이런 그들의 주장을 번역한 것이다.

 

단군신화 5

단 군론을 번역한 전성곤은 책 뒤에 해설을 붙였는데, 그 해설을 활용해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요약해 보겠다.

나카 미치요는 단군의 이름을 왕검(王儉)이라고 한 것은 평양의 옛 명칭인 왕험(王險)을 왕검이라 바꾼 것이고, 이 전설은 불교가 동쪽으로 흘러들어온 이후에 승려가 날조하여 나온 망 탐으로 조선의 고전(古傳)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스승 나카 미치요의 설을 수용 확대하여 환웅이 강림하였다는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니, 고기(古記)에 단목(檀木)이라 한 것은 이 산중에 나는 향목(香木)을 두고 하는 말이니 이는 인도의 우두 전단(牛頭旃檀)을 모방한 것이라고 했다.

이 단목 아래 환웅이 강림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 단군(檀君)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그것이라는 주장이다. (전단이라는 향나무가 있다는 인도 마라야산이 소머리 형상이어서 우두전단이라 한다.)

또 하나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게재된 주몽전을 보면, 주몽의 양부는 금와인데 이 금와의 양부는 부루요 부루의 실부는 단군이므로, 단군은 조선의 조상이 아니라 고구려 한 나라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기자가 한반도에 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여 기자조선을 배제했다.

이 계통을 이어 이마니시 류는 단군왕검의 네 글자를 문제 삼으며, 단군왕검의 단군은 존칭이요 왕검은 이름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왕검은 지명 왕험이 변한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단군 이름이 <삼국사기>나 <고려도경> 등의 서책과 서경의 팔선인(八仙人) 중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시에 단군의 호칭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선인 왕검이 있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면서 서경의 여덟 선인을 거명했다.)

고구려 시대에 평양의 고 지명으로 전했던 왕험이 고려 시대에 선인 왕검으로 변하여 평양 창건 선인의 실명으로 되었는데, 고려 중기에 단군이란 존칭을 붙여 단군왕검이라 하여 고조선을 처음 개국한 신인이라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 다시 왕검을 떼어내고 단군이라고만 불러 단군으로 정착되었다는 주장이다.

미우라 히로유키는, 조선의 개국 전설로는 단군과 기자를 들 수 있는데, 단군 전설이 처음 보이는 것은 <삼국유사>요, 조선의 가장 오랜 역사 서적인 <삼국사기>에는 실리지 않았단다.

거기와 비교해 기자 전설은 서적에 오른 것도 더 오래되었고, 기자를 신으로 모신 자취는 고구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단군 전설은 겨우 고려시대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하나는 조선에서 단군에 대한 제사와 존숭이 융성한 시기를 역사적으로 보면 그 독립 자존심이 왕성한 때라는 것이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조선 역사의 시작을 중국의 정치적 실패자가 반도에 들어와 터전을 건설한 것에 두었다.

고려가 중국을 사대하기 위해 주몽 전설이나 난생설화를 버리고 기자 전설에 근거하여 기자 묘를 세웠고, 조선 역시 사대를 위해 기자 전설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기자 전설은 지배계급이 중요시했으나 사회 저변에서는 단군 전설을 신봉하다가 일본에 합병되어 지배계급이 사라지자 단군 전설이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학자였던 오다 쇼고는 단군은 '단님'인데 단님은 '달님'의 전화로서 그 뜻은 산군(山君) 산주(山主) 또는 산신(山神)이라는 것이다. 달은 양달 응달이라고 할 때의 달이다.

오다 쇼고는 단군 전설은 몽고 침략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으며, 그 성립연대는 <대장경> 각판 전후일 것이라고 했다.

주자학자들은 불교를 배척하였고 단군전설을 믿지 못할 이야기로 보았으나, 조선 말기에 단군전설을 국조 신화로 날조하여 이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단군전설은 고려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왕검이라는 이름은 평양의 옛 이름인 왕험일 따름이며, 단군 전설 자체가 승려들이 지어낸 망탄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최남선은 이들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승도 망담설', '왕험성 신설', '성립 연대관', '민족적 감정설', '관학적 단안'으로 정리하여 조목조목 비판한다.

참고로 <일본인들의 단군 연구>라는 책에는 다나카 토시아키, 사이토 타다시, 하라다 가즈요시, 오다 세이코, 다카하시 토오루, 이노우에 히데오 등의 글도 실려 있다.

일본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단군신화에 대해 얼마나 광분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김상윤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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