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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 동아시아 역사문화의 실마리일제조선총독부가 파괴한 단군을 복원할 때 부러진 민족사가 바로 선다.
김상윤 | 승인 2020.09.02 20:07

글: 김상윤( (사) 윤상원 기념사업회 고문)

 

 

‘단군신화’는 동양사의 시원을 여는 문명의 열쇠 꾸러미

역사에 바탕을 둔 단군을 일제는 전설로 폄하여 역사에서 제거

우리역사에서 단군을 삭제, 기자도 제거 위만을 시조로 가르쳐

최남선은 이에 대항하여 단군연구로 단군역사 본 모습으로 복구

단군조선의 실재와 역사라는 사실은 국내 문헌으로 충분히 증명

 

서기1394판 삼국유사 5번째 권이다. 범어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삼국유사 초판본이다. 삼국유사 첫장에 한인, 한웅, 단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신화형태를 띠고 있지만 역사요소를 모두 갖추어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일연이 쓴 것이 아니라 단군과 단군 전후의 역사가 기록된 당시 존재하던  '위서'와 '고기'를 그대로 갖다 붙여 놓고 있다. 이는 단군역사기록이 승려 일연이 생존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한다(편집인 주). 자료: 범어사 성보 박물관 제공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신화 고갱이를 마구잡이로 털어놓은 셈이다.

마고여신, 텡그리, 샤먼, 해와 달 그리고 별, 땅과 신.

거의 매일 한 꼭지씩 50 꼭지 가깝게 털어냈다.

메모하는 셈치고 대충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었으니, 아마 잘못된 내용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풀어낸 이야기로 우리 신화의 짜임새를 그런대로 그려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제 구체적인 개별 신화를 이야기하려 하나, 역사와 얽혀 있는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특히 단군신화의 경우는 우리 역사의 출발점과 관계되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단군신화를 단순히 신화 이야기로만 한정지어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내몽고지역의 홍산 문화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고조선사 연구도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단군신화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최남선에 의하면, 조선은 동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나라이며 단군은 그 인문적 시원이므로, 단군은 조선사'만'의 문제가 아니며 조선은 동양사'만'의 문제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제침략기 나카 미치요를 시발로 하여 시라토리 구라키치,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등 일본 학자들은 단군과 단군신화를 폄훼하여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단군의 이름 왕검은 평양의 옛 명칭인 왕험을 왕검으로 바꾼 것이라던가, 단군 전설은 불교 승려들이 날조한 망탄으로서 조선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가 아니라는 따위다.

게다가 고구려 주몽의 양아버지는 금와요, 금와의 양아버지는 부루요, 부루의 실제 아버지는 단군이므로, 단군은 조선의 조상이 아니라 고구려의 조상이라는 억지 등도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본 학자들은 결국 단군을 조선사 첫머리에서 제거하고 기자를 조선의 국조로 세우더니, 기자도 가상적 인물이라는 시라토리의 주장 이후에는 위만이 조선의 개국자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일본 학자들은 조선사에서 단군을 제거한 후 조선사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서술하게 된다.

역사 시작 연대는 가급적 끌어내리고 조선시대부터 이후의 모든 역사는 반도 안에서 전개되었다는 식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최남선은 1926년 3월 3일부터 7월 25일까지 동아일보에 '단군론'을 연재하여 일본학자들이 주장한 단군론의 잘못을 맹렬히 비판했으며, 이어서 '단군 및 그 연구', '단군고기전석'을 발표하여 단군신화의 위상을 다시 제대로 바로 잡고 있다.

물론 최남선 이전 조선시대에도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는 있었다.

그러나 일본 학자들이 '단군과 단군신화'를 의도적으로 훼손하던 작업에 맞서, 단군신화의 진면목을 드러내려던 최남선의 작업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단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우리나라 문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고려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에 '선인(仙人) 왕검'이 나오는데, 왕검의 이름이 나타난 가장 오랜 문헌이라고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단군 이야기는 전혀 없다.

삼국사기보다 130여년 뒤에 출간된 <삼국유사>에 단군 이야기가 나오고, 비슷한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 단군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 우왕 때 권근이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가 단군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 하자, '응제시'(應題詩)에 단군 이야기를 넣었다. 이 '응제시'에 붙은 '응제시주'의 내용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와 거의 같다.

'들으니 태고의 먼 옛날

나무 가에 내려온 단군

동쪽 나라의 땅에 임하시니

때는 요임금의 시대였다고 하네.'

조선 태종 때 권근 이색 하륜 등이 찬집한 <동국사략>과 정인지의 <고려사>(1451)에도 단군 기록이 나온다.

'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태백산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우고(요 임금 25년 무진년),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으로 옮겼고, 나중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이것이 단군이다.'

(동국사략 권1, 단군조선)

'요 임금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이라 불렀다.'(고려사 권58)

그러나 조선시대에 단군 기록이 가장 자세히 나오는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내용과 거의 같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현존한 단군전 중에서 형체가 가장 잘 갖추어진 것이라고 한다.

'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이름이 웅(雄)인 서자가 있었는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가지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왔으니, 이가 단웅(檀雄) 천왕이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혼인해서 아들을 나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 동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이 세워서 다스린 곳이다.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다. 이를 동부여의 왕이라 한다.

단군은 요 임금과 같은 날에 임금이 되었고, 우 임금의 도산 모임에 이르러,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038년,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

부루는 아들이 없어 금색 개구리 모양의 아들을 얻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세웠다.'(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

1675년 북애거사가 쓴 <규원사화>에 '단군기'가 있고, 물론 '환단고기'에는 여러 대에 걸친 단군 사적이 나온다.

최남선은 주로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단군론'과 '단군 및 그 연구' 그리고 '단군고기전석'을 썼다.

김상윤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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