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성곽에 나타나는 우리와 외국의 정서가 하늘과 땅 차이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전쟁 발발시 유럽과 일본은

귀족들과 무사들만이 성으로 들어가 항전

일본백성은 산으로 도피 후 이긴 쪽에 붙어

한국은 군관민이 일체되어 성안에서 싸움

일본은 힘센자가 지배하는 중국 전국시대 유사

 

▲ '하기'의 산성 부근. 평지의 하기 성(城)과는 별도로 산 정상에 독립된 산성(詰丸)을 설치하여, 여기에 다시 혼마루(우)와 니노마루(좌) 등이 반복된다.

<오사카의 여인> 세번째 이야기

하기(萩) 시 - 조슈의 번성(藩城, 수도): 존재의 이유

막부(幕府)시대의 번주(藩主, 다이묘)들은 성벽을 겹겹이 두르고 2, 3중의 방어벽을 치는 등 오직 방어에 만전을 기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불의의 습격을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어느 방향으로나 쉽게 벽을 뚫고 도주할 수 있도록 사방의 벽을 얇은 칸막이로 만든다던가, 암살자가 몰래 복도를 걸어오더라도 마루바닥이 특별한 소리를 내도록 만들거나, 마루대신 자갈을 깔아 같은 음향효과를 내게 한다는 등 일본의 성(城)들은 각각의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하기 성(城)의 뒷산에는 '하기 성'과는 별도로 독립된 산성(詰丸)을 설치하여 여기에 다시 본성(本丸, 혼마루)와 니노마루 등을 반복함으로서, 만약 '하기 성'이 함락되더라도 이곳 산성이 다시 최후의 요새가 되도록 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의 성들은 전쟁이 나면 귀족들과 무사들만이 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는 형태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전쟁 중 산으로 도피해 있던 백성들이 싸움이 끝난 후 나타나서 이긴 쪽의 사무라이들에게 세금을 바치면 끝나게 되는 참으로 편리한 사회 시스템이었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전쟁이 나면 군관이 일체가 되어 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는 형태의 사회 시스템을 띠고 있다.

이렇게 왕과 백성이 일체가 되어 전쟁에 동참하는 일은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으로 우리 사회는 설명이 쉽지 않은 대단한 이념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경복궁의 담장. 일본이나 중국, 유럽의 성에 비하면 조선의 궁성을 두른 담장은 민가의 담장에 가까우며 약간 더 높을 뿐이다. 나라의 궁성인 경복궁의 담장은 엄청난 군사적 방어의 개념이 없다. 대포와 군사적인 공격을 감안한 성벽의 개념이 아니다. 일본이나 중국, 유럽의 궁성과는 개념을 달리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모든 성들은, 소라의 단단한 껍질을 집으로 삼고 따라서 제 몸에 어울리지 않게 큰 집을 지고 다니는 소라게(집게)의 우스운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이며 전투적으로 극단의 생존만이 강조되고, 오직 생존에만 절대적이고 최고의 가치를 두는 일본의 독특한 사무라이 사회의 성격은 하기(萩)라는 도시에서도 그 생존본능의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다.

일본은 근대까지 2,500년전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와 아주 흡사한 사회였다. 바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이 그것이다.

사회의 질서를 칼에만 의존하는 방식, 말 대신 무력을 과시함으로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식을 보면 일본이 중국의 춘추시대와 동일선상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일본 전국의 수백 개로 나뉘어진 번(藩)들이 각각 독자적인 행정ㆍ군사ㆍ사법 체제하에서 번주(藩主, 다이묘)의 지배를 받았다.

동시에 다시 중앙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지배를 받는 이원적인 막번(幕藩)체제는 아무리 보아도 춘추오패(春秋五霸)의 이원체제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 하기(萩) 시의 방어 구조. 위 지도를 보면 물을 채운 해자(垓子)가 3중의 방어 구조를 하고 있다. 또 하기 시 전체가 강으로 둘러싸인 삼각주인데 이것까지 고려한다면 4중의 해자가 되는 셈이다.

한일역사 기행에 동행한 이쓰코는 당시 일본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침실에서는 시종이 영주 대신 아랫목에서 비단이불을 쓴 채 잠을 자고, 영주는 윗목에서 시종처럼 잤으며, 음식은 시종이 먼저 먹어 독극물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먹을 수 있었답니다.

어떤 일본의 대영주는 자신을 독살하려고 음식에 독을 넣었다며 그의 친 어머니와 동생을 죽였고, 아들에게 살해당한 영주도 있었으며, 형제나 충성을 맹세한 가신으로부터 살해당한 영주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었지요"

출처: <오사카의 여인> 곽 경, 어문학사, 2015.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