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는 아득한 시대로 부터 단절없이 이어져 왔다.

글: 류돈하(역사연구가)

 

 

추모성왕의 고구려와 태조왕건의 고려는 별개의 나라인가?

▲ 몽골제국 원나라 세조 쿠빌아리칸. 그는 고몽전쟁시 고려가 먼저 입조하여 강화를 하자고 하자, 크게 반색하며, "당나라도 굴복시키지 못한 고려가 입조하였다"고 감탄했다.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위치한 국보 제 205호 중원고구려비는 1979년 발견된 고구려의 비석이다.
고구려의 전성시대 때 고구려가 건립한 이 비석의 첫머리에는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 새겨져있다.
고구려는 스스로 자국을 일컫어 고려라 한것이다. 이것은 금석문 자료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사례이다.
문헌에서는 중국 정사 25사중의 하나인 송서에서 고구려를 고려로 칭한 것이 처음이다.
송서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유유劉裕가 세운 송나라의 역사를 담은 사서로 조광윤의 송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유송이라 부른다.
그밖에 남제서, 양서, 진서, 위서, 북제서 주서, 수서, 구당서, 신당서에도 고구려를 고려라 부르고 있다.
이는 중원고구려비와 함께 볼때 장수왕 시절에 고려로 표기되어 있는데, 고려는 곧 고구려의 약칭이다.
중국 북송 휘종때의 사람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도 고려 왕씨를 고려(고구려)의 대족이라 하며 고려를 내내 고구려와 같은 나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같은 기록이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만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구오대사, 신오대사, 고려사, 명실록에서도 고구려와 고려를 구별없이 같은 나라로 언급한다. 특히 고려사에 보면 고려 고종황제의 태자 왕식(고려원종)이 30여년간 이어진 몽고의 침략을 종식시키기 위해 1259년에 원나라로 가서 원나라 세조 홀필렬을 만나게 된다.
이 때 원나라는 헌종 패아지근몽가가 죽고 그의 두 동생 홀필렬과 아리불가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자가 몽고에 입조해서 항복을 하러 간 것이었다. 홀필렬 입장에선 고려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왔으니 자신의 처지가 매우 유리한 상황에 이르게 된것이다.
홀필렬(쿠빌라이)이 고려의 항복에 매우 감격하여
"고려는 만리의 나라이다.
일찍이 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이다." 라는 발언을 하였다. (고려사절요 원종순효대왕 편)
그러면서 고려 태자의 입조와 고려 측의 항복을 하늘의 뜻이라 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이란 국호는 그 어원과 사용의 역사가 유구한 이름이다.

서기 698년에 고구려유민출신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일어난 나라이다.
발해 고황제 대조영의 뒤를 이은 제2대 황제 무황제 대무예는 서기 727년(발해인안 8년) 일본에 사신을 최초로 파견해 국서를 보냈다.
대무예가 보낸 국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여러 번국을 아우르면서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살고 있고 부여의 유속을 물려받았다"
무황제 대무예의 국서는 일본 속일본기에 실린 기록이다.
또 무황제는 자신의 친동생 대문예와 설전을 벌일때도 고구려를 고구려라 하않고 고려라고 한 용례가 있다.
이처럼 고구려를 고려로 약칭하여 표기한 용례들은 부지기수이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구려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라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성종황제시절에 거란족의 요나라 장수 소손녕(소항덕)이 쳐들어왔을때 문하시랑평장사 서희(이천서씨2세조)가 태조왕건의 고려는 분명 고구려를 이은 것이라 명확히 밝힌 것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점이다.
고려의 대신 서희가 요나라 동경유수 소항덕을 상대로 이러한 설전을 벌인 끝에 고려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강동육주를 수복하였다.
서희는 설전에서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고구려를 이었기에 그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고 하였으며 고구려와 고려의 도읍지를 평양이라 강조하였다.
(我國 高句麗 舊也. 故號高麗都平壤)
고구려와 고려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넘어 고구려의 후신은 조선이다라는 등식은 조선시대때에도 여전히 그대로 이어졌다.
즉 고구려와 고려, 조선은 내내 한 나라로 쭉 이어져 왔다라는 것이다.
조선 성종떄 중국 명나라 절강성 영파부에 표류하게 된 조선관원 금남 최부는 당시 조선인에게 금역이었던 명나라의 강남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고적·풍속·민요 등을 관찰하여 이를 책으로 남겼으니 곧 표해록이다.
금남의 표해록에 따르면 그는 표류와 동시에 당시 명나라 사람들로부터 왜구로 오인받아 여러차례 심문을 받았다.
명나라 안찰어사는 조선(고구려)이 옛날에 당태종의 대군을 물리친 비결을 질문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백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떄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고 당태종의 공격을 물리친 나라가 어떻게 이리 쉽게 왜의 공격을 받을 수 있냐고 의심하였다.
이는 명나라 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외에도 서애 류성룡의 문집에서도 당태종을 언급하며 고구려와 조선을 같은 나라로 보는 당대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판 수양대군이라 할만한 고려 제 15대 황제 숙종은 1105년 가을, 서경에 행차하여 사신을 보내 동명성제사에 제사를 드리고 폐백을 올리게 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고구려 시조에 대한 추숭사업이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제 8대 황제 현종때에도 동명왕에게 훈호를 올렸다는 고려사 기록도 있다.
태조왕건이 세운 고려와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국적을 막론하고 역사의 기록들이 하나같이 증명하고 있다.

고려는 우리역사에서 삼국시대 고구려의 뒤를 계승하고 근세 조선의 뿌리가 되는 허리에 해당되는 비중이지만, 빈약하지 않은 기록들에 비해 무명의 세월을 오래 보내왔다.
숱한 외침 속에서도 자주의 기풍을 잃지 않은 고려는 우리의 과거이자 우리 미래의 방향으로 삼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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