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9.7.19 금 16:39
상단여백
HOME 시대별 주제 고대사
백제 온조왕의 초기 도읍지, 위례성의 진실위례성에는 온조왕의 파란만장한 백제 건국역사가 담겨 있다
박찬우 시민기자 | 승인 2019.07.09 00:14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⑥ 백제의 초기 도읍지 위례성을 찾아서


<세종실록지리지>는 백제 온조의 위례성을 현재 천안으로
천안=직산 위례성이 먼저 생기고 하남위례성 나중에 생김

소서노,
분열한 온조와 비류 재결합 시도하다 희생된 설화도 전해옴

 

▲ 온조는 두 차례 분립과정을 통해 백제 건국을 완성한다. 서기전14년 마한으로부터 땅을 빌려 직산위례성으로 이동하고, 이후 서기전6년 어머니 소서노의 죽음과 함께 하남위례성으로 이동한다. *출처 : [백제역사의 통곡](논형,2018)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편에 ‘하남위례성’이 나온다. 온조가 도읍으로 삼은 백제의 건국지이다. 하남(河南)은 ‘강의 남쪽’을 가리켜, 지금의 한강 이남의 남한산성이 소재한 경기 광주(하남)일대가 유력하다. 특히 남한산성내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온조의 궁궐이 있으며, 산성아래에는 온조가 사용한 ‘어용샘’도 있다. 참고로 위례는 특정장소를 나타내는 지명이 아니라 ‘울타리’, ‘담’을 나타내는 일반명사이다. ‘도성’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남한산성 일대가 온조의 위례성일까?

[세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세종은 옛 삼국의 수도를 규명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조정은 고구려와 신라의 수도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고증하나, 백제의 경우는 공주(웅진)나 부여(사비)와 달리 초기 도읍인 위례성의 위치는 쉬이 찾지 못한다. 이때 조정은 [삼국유사]<왕력>의 온조왕 기록에 근거하여 직산(稷山)을 온조의 위례성으로 고증한다. ‘위례성에 도읍하였는데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이다.(都慰禮城一云蛇川今稷山)’ 직산은 지금의 충남 천안이다. 당시 세종은 특별히 직산에 온조왕사당을 건립하고(세종11년,1429년) 직접 향축을 내려 제사지내기도 한다.(#1세종실록지리지기록) 이후 조선에서 발간하는 각종 지리지는 충남 직산을 온조의 위례성으로 표기한다. 현재 직산에는 위례산성(직산 성거산)이 있으며, 온조의 신하를 조상으로 하는 직산조씨(조성), 천안전씨(전섭), 목천마씨(마려) 등의 본가가 있다.

▲ [조선팔도지도]의 직산 위례고성.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그렇다면 ‘하남위례성’과 ‘직산위례성’은 다른 것일까?

두 곳 모두 온조의 위례성이다. 이는 온조의 백제 건국과정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온조는 서기전18년 한반도로 남하하여 미추홀(충남 아산 인주)에서 형 비류와 함께 있다가 서기전14년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직산위례성(위례산성)으로 분립하며 온조의 백제를 정식으로 출범시킨다. 이때 온조의 분립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 소서노가 비류와의 재결합을 설득하기 위해  온조를 찾아왔다가 뜻하지 않게 온조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2위례성우물설화) 이해는 서기전6년으로 [삼국사기]가 기록한 ‘오호입성(五虎入城)’사건이다.(#3삼국사기기록) 소서노의 죽음을 알게 된 온조는 형 비류의 문책이 두려워 급히 한산으로 천도한다. 한산은 지금의 경기 광주(하남)의 하남위례성(남한산성)이다.

결론적으로 ‘직산위례성(위례산성)’은 서기전14년~서기전6년까지의 위례성이며, ‘하남위례성(남한산성)’은 서기전6년 이후의 위례성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하남위례성만을 기록으로 정리한 것이다.

참고로 남한산성과 인접한 서울시 송파구 일대(풍납토성,몽촌토성)를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고이왕(8대)의 위례성이다. 고이왕은 온조계열과 다른 또 한 분의 백제 시조이다. 또한 정약용이 지목한 ‘하북위례성’도 있다. 근초고왕(13대)이 천도한 ‘한산’으로 북한산 주변일대의 위례성이다.

위례성 역사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백제 건국과정의 비밀이 담겨 있다.

▲ 위례성의 위치비정은 「천안직산설」과 「경기하남설」이 병존한다. 「천안직산설」은 [삼국유사] 기록, 「경기하남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근거한다. 「서울송파설」은 기록은 없으나 풍납토성의 유물 발굴을 통해 부분적으로 입증된다. 학계의 입장은 중용이다. 서기전6년 한산천도를 기점으로 이전은 천안직산, 이후는 경기하남이나 서울송파로 이해한다. 참고로 [百濟記](저자 미상)는 백제의 수도 변천과정을 직산위례성→광주남한성→한양북한성→공주웅진→사비 순으로 설명한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1. [世宗實錄地理志] 稷山縣. 本慰禮城 百濟始祖溫祚王作都建國 … 百濟始祖溫祚王廟【在縣東北間五里 今上十日年己酉七月始立廟 春秋傳香祝致祭】 직산현. 본래 위례성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도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다. … 백제 시조 온조왕사당 【현의 동·북쪽 사이 5리에 있다. 금상 11년(1429년) 기유 7월에 처음 사당을 짓고, 봄가을에 향축을 전하여 제사를 지내다】

#2. [충남전설집](충청남도향토문화연구소, 1986년) 하권에 나오는 ‘위례성 우물’ 설화이다. 내용은 이렇다. 온조왕이 강변에서 용이 되어 물살을 헤집고 있을 때, 마침 어머니 소서노가 큰 아들 비류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작은 아들 온조와 합칠 것을 권하기 위해 위례성을 찾아온다. 온조의 움막에 들어가 보니 온조는 없고 행방조차 아무도 모르는지라 소서노는 반란군이 온조를 죽였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함께 온 비류의 부하들로 하여금 온조의 부하들을 무찌르게 한다. 온조의 부하들은 비류가 온조를 쳐부수러 온 것이라 판단하고 힘껏 싸워 비류의 부하뿐 아니라 소서노까지 죽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온조는 부하들로 하여금 돌을 날라 오게 하고 위례성 우물에 돌을 던져 북쪽과 남쪽으로 통하는 물줄기를 막는다. 이후 온조는 왕이 되어 한강변 광주(하남)땅에 다시 위례성을 세우는데 그 이후로 위례산의 위례성 우물은 흙탕물이 고이게 되었다고 한다.

#3. [三國史記] 始祖 溫祚王. 十三年(前6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况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박찬우 시민기자  horizon1011@hanmail.net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찬우 시민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조선사(주) | 주소 : 서울 강남구 역삼로7길 17, 네스빌 609호  |  대표전자우편: mukto@naver.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오종홍
발행인 : 나한엽  |  편집인 : 오종홍  |   등록번호 : 서울 아03803  |  등록일자 : 서기2015.06.22.
Copyright © 2019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