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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골에 펼쳐지는 광활한 땅 부여역사역사는 어느 때나 정치를 움직이는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
공관 | 승인 2019.06.07 23:47

 

글: 공관(동북중앙아시아연대의장)

 

동몽골에 사는 많은 족속들은 우리와 친연성 깊어

유대인 독립국가건설에 <유대인의 전쟁> 사료가 큰 힘

지나인도 역사를 가지고 오늘날 국경을 만들고 있어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 장래 없고, 굴종 오욕만이 남아

부여 뿌리는 알타이·사얀산맥과 바이칼호수 주변 추정

7백년 역사 부여의 광활한 땅 예맥 선비도 부여족속

고려말 북원과 함께 명나라 멸망시키고 고토회복기회

이성계 위화도 회군반란으로 물거품 천추의 한으로 남아

 

▲동몽골 초원에 서 있는 석인상. 우리 제주도 하루방과 닮아 있다. 하루방은 마을 또는 집안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동몽골의 고대 우리역사

-동몽골 호룬보이르 초원에 서면 2만리 갈녘 헝가리 평원이 눈앞이다 - 空廬

■ 역사, 살아있는 정치다.

우리민족의 족원族源을 탐구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identity과 민족성ethnicity을 알기 위함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자기 탐구 본능이다.

먼 옛날 우리와 족원族源이 닿는 괵투르크족이 사얀·알타이산맥을 떠나 남서쪽으로 갔다. 한 갈래는 지금의 천산산록의 키르기스스탄을 비롯하여 중앙아시아에 정착했다. 또 한 갈래는 지중해와 흑해의 아나톨리아반도 터어키에 웅거했다.

사얀·바이칼의 북이고리족北夷橐離族의 한 갈래인 한민족은 동남쪽으로 남하했다. 한 땐 몽골고원 한티산록 불함산(부르칸 할둥)과 대·소싱안령을 강역으로 했으나, 고구려가 망한 후, 좁은 한반도에 묶였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의 고토에 지나支那 한족이 일부 강점하고 있는 산하도 있지만, 우리와 혈족이 닿는 몽골, 코리족의 부리아트, 투와족, 사하족은 그 땅에 꿋꿋이 살아오고 있다.

우리민족의 시원/원향과 지나온 발자취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학자 개인의 안목과 역사관史觀에 따라 서술이 판이하다. 이 점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단 나는 역사가 정치의 중요한 한 축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유대인 역사에서 “요세푸스(37~100)가 쓴 <유대인의 전쟁>이라는 책이 겨우 남았다. 이 책은 소수 기독교회에만 전해져 보존되었으며 이천년 동안 역사 속에 진정으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유대인들이 건국운동을 할 때, 그것은 다시 유대인들의 역사적 기억으로 부각되어 중요한 정신적 자원이 되었고, 부단히 해석되는 가운데 이를 빌어 민족 응집력을 동원하는 관건적인 상징이 되었다.” (*1)

일본제국이 만주를 점령할 때도 그 땅의 역사를 들먹였다. ‘일본만주국’ 행정의 실질적 일인자였던 호시노 나오끼는 “만주라는 땅은 역사적으로 보면 한漢민족 전유의 땅은 아니다.

그 땅에서 흥했던 것은 우랄 알타이 민족에 속한 퉁구스족의 나라들 고구려‧ 발해‧ 금‧ 요나라가 있었다.

그 땅을 정복 지배했던 원元도 우랄 알타이 민족에 속한 몽골족이었다”(*2) 라고 했다. 우리의 고토를 역사적 논증으로 지나 한족과는 무연한 걸로 획정 지었다. 그리고 일본제국의 점령을 정당화 했다.

지나에서 세계 유래 없는 역사왜곡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지나정부는 그들이 강점/지배하고 있는 다른 민족을 ‘소수민족’이라 일컷는다.

그 타민족의 유구한 민족사를 자국사로 포함시키는 연구작업이 한창이다. 중화제일사관에 억지로 맞추고는 편입시키는 것이다. ‘동북공정’이나 ‘청사공정’ 등이다.

그 땅의 역사가 어디에 귀속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 행위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리/장소를 역사로 구획 짓는 것이다.

역사가 살아있는 정치다. 무섭지 않는가? 그래서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겐 장래가 없다. 굴종과 오욕만이 있는 것이다.

▲동몽골 할인골에 직승기로 내렸다. 왼쬭에서 다섯번째가 필자.

■몽골고원/동몽골과 고리족 북부여와의 관계

우리 민족과 몽골고원과는 고래로부터 많은 연고가 있었다. 동몽골 훌룬부이르 초원을 중심으로 동과 남으로는 대·소싱안령의 송눈평원에서 시라무렌 강의 동서로, 서로는 몽골고원의 중심지였던 알타이·사얀산맥과 바이칼까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우리의 역사적 기억으로 재조명되기를 나는 바란다.

특히 문헌사료로는 동한시대의 도가철학자 왕충(25~220)이 지은 <논형> ‘북이고리국北夷橐離國’조가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부여(북부여)가 북이고리국에서 나왔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자의 현재 한국식 발음인 탁리槖離(tuóli), 고리槀離(gáoli), 색이索夷(suôyi) 고려高麗(gāoli)로 읽히는 것을 ‘고리’로 표기한다. 모두 소리대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글자의 변동이 생겼다고 여긴다.)

간요하면, “부여를 창업한 ‘동명’은 고리국에서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리국왕의 시녀였다.

그는 고리국에서 남쪽 ‘엄체수’를 건너와 도읍을 정하고 부여국을 세웠다”(*3)고 했다. 즉 ‘북부여’다. 부여의 선조인 고리국은 알타이·사얀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자칭 고리족이라 부르는 부리야트족이 살고 있는 터전이다.

동북공정에 따른 지나의 고리·부여관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다. <총·균·쇠>로 널리 알려진 지나 이름 가덕대몽賈德戴蒙,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가 나와 놀랐다.

그가 “부여는 부리야트인과 일본인(大和人)의 조상이다. 기원전 4·5세기에 바이칼호에서 만주로 이주했다”(*4)라고 했다.

단 어떤 고고학적 증거로 그 관점을 증명한 것은 아직 없다고 한다. 놀라운 통찰이다. 그의 안목이 지구를 통째로 하여 문명사적으로 보기 때문일까? 그의 원문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동몽골 부이르 호수에 답사단원들과 도착했다.

지나 한족들의 문자장난이 워낙 심해서 문자뿐만 아니라 역사적 지명도 바꾸는 것이 다반사다.

예컨대 2005년 9월, 나는 동지들과 함께 고토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눈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고도 부여를 찾았다.

현장의 지리/풍토를 알아야 우리민족의 살아온 발자취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안내를 맡은 길림대학 재학중인 조선족 청년과 지도를 보고 찾아갔으나 옛 부여시가 아니었다.

부여라 쓰인 현청 정문 경비에게 물으니, 현재의 부여 현청은 생긴지 몇 년 안 된다고 했다. 서쪽으로 100㎞ 가면 송원松原이란 곳이 나온다고 했다.

그 곳이 옛 부여라고 했다. 현재 송원에 가서 보니 옛 부여가 보였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부여인이라 하지 송원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 지나 당국의 집요한 ‘부여사’ 지우기 현장을 보았다.

지나학자들 가운데 간지경은 “고리의 땅은 지금의 호눈평원呼嫩平原이다.” 유목 부여인과 관계되는 “백금보문화며, 이것은 고리의 전형적 분화유적일 가능성이 있다”(*5)라고 했다.

장박전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4개의 부여로 구분하였다. 한, 위, 진 시기의 부여는 지금의 호눈평원일대(현재의 동몽골과 흑룡강성의 눈강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6:)

지나학자들도 고리국을 동몽골 훌룬부이르 초원과 흑룡강성의 눈강(嫩江)평원으로 비정하기 시작했다.

고리국이 동명성왕이 창업한 북부여의 몽골고원, 훌룬보이르 초원과 겹친다. 아직까지는 고리국을 바이칼호까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고고학적 유물이 앞으로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부여는 사서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700여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에 대한 우리의 기록은 부실하다.

고조선 다음으로 부여의 역사와 이동 광역은 의외로 넓다. 북, 동·남부여와 고구려, 요서백제와 한반도 백제뿐만 아니라, 예맥과 선비도 고리부여와 족원族源이 직결된다.

그 초기 부여(북부여)의 터전이었던 동몽골 호룬부이르 초원과 눈강평원을 포함한다.

<논형>에 나오는 고리가 바이칼 부근이라면, 그곳에서 나온 부여의 원향은 당연히 사얀, 바이칼호유역이다.

부여의 늙은 노인들은 스스로를 ‘망인亡人’(7) 이라고 했다. 어느 곳으로부터 이주해 온 민족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북쪽 사얀·바이칼호로부터 지금의 몽골고원의 동쪽 호눈평원(呼嫩平原)을 거쳐 눈강과 송화강, 즉 송눈평원과 시라무렌강 동서를 무대로 살았다. 사방 2천리의 강역이었다.(*8)

그리고 훗날 추모(주몽)가 동몽골 흘승골(할하강)을 건너고,(*9) 대싱안령의 낮으막한 고개를 넘어 남하하여 고구리(高句麗)를 세웠다.

▲ 몽골측 안내원 학자들과 함께.

그러나 못난 우리는 그곳을 오랑케 땅이라고 굳이 잊으려 했다. 우리의 출자出自도 굳이 속이려 들었다. 중화사대, 공구孔丘의 춘추필법이 심어준 경독經毒의 피해가 막심하다.

몽골고원의 동몽골 훌룬부이르 초원, 그곳은 우리 한민족 태반의 하나였다. 1387년, 북원이 훌룬·부이르 호수가에 선우정을 설치하고, 고려의 원병이 오길 간절히 바랐다.

신생국 명나라를 동몽골에서 막아 우리의 고토를 회복하자함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그 이듬해 북원은 명군의 기습으로 패했다. 단군이래의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 후 600여년만인 오늘날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2000년부터다. 그 단초는 동북중아연대(NECAS)가 열었다. 아직 진척이 없다. 아, 천하길지의 그 대지가, 북부여의 남천 이후 2,300여년 만에 우리 앞에 와 있다.

이 호기를 놓치면 안 되는데. 답답하다. 속이 끊는다.

-참고자료

(*1:거자오광 『사상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연승 역, 영남대학출판부 2008. 227~229쪽)

(*2:武藤富男『私と滿洲國』 文藝春秋 東京 1988. 9쪽, 星野直樹 「滿洲國史」인용)

(*3: 王充, 『論衡』 吉驗:北夷橐離國.

(*4: 賈德 戴蒙, 扶余, 【美国】一位人类学家贾德·戴蒙说,扶余就是布里亚特人与大和族祖先,公元前四、五世纪从贝加尔湖移居东北。但是未有任何考古学的证据证明其观点。

https://baike.baidu.com/…/%E6%89%B6%E4%BD%99%E5%9B%…/641553…

(*5:干志耿 著《古代槖離硏究》(《民族硏究》1984年 第2期), 范恩實 『夫余興亡史』,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3. 4쪽에 인용.

(6: 張博泉 《漢玄菟郡考》 (《吉林大學社會科學學報》 1980年 第6期, 范恩實 『夫余興亡史』,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3. 7쪽에 인용.

(7: 『三國志』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 夫餘. ‘自謂 亡人’

(8:상동

(*9:『한국 고대사를 셍각한다』 최태영, 눈빛,2002.107쪽),

2019.06.01. 한반도 서울 인능산 빈집에서. 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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