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는 일제가 그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며 친일부역 변명하기 바빴다

 

글: 최기종(시인, 자유기고가)

 

그의 소설 ‘최체부의 군속지망’에서는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로 큰 획을 그었다고 외치고

최체부는 떠난 달부터 꼭꼭 돈을 부쳐서 집안 살림이 궁색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궁성 요배하는 습성이 생겼다고 하고

침략전쟁에 복무하는 것이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이라고 선전 선동함

 

전두환 군사독재 반란군에게는 낯 뜨거운 충성 찬양

“이 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와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과 두루 님께 오시나이다”

 

▲한 평생 부왜매국과 군사독재 찬양, 변절로 살다 간 민족반역시인 미당 서정주. 국문학에서는 거두로 찬양, 칭송되며 그를 숭모하는 미당 문학상까지 나왔다. 우리 사회 곳곳에 여전히 친일부역, 민족반역자들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우리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친일부역자 청산이 물건너간 후과가 광복 74년이 되어 가지만 우리를 후벼파고 있다.

서정주를 말한다

1.

그의 친일행각이 드러나지 않은 시절에

애비는 종이었다는 그의 시 ‘자화상’을 보면서

그 부끄러운 고백에 감탄한 적이 있었지

살아온 삶의 무게가 진정성이 느껴지는 시라고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게 모두 가식이었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겨우 스물세 살에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바람을 운운하고 부끄러움을 운운하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겠다고 하니

그렇게 권력에 아부하고 굴종해서

호의호식하다가 85세 갈 때까지

반성과 참회를 거부한 그의 자화상은 과연 무엇인지

그가 친일 부역시를 처음으로 쓴 게 스물여섯이었어

그는 ‘시의 이야기’ 평론에서

동방 전통의 계승을 내세우다가 은근히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펼쳤지

일제 종군기자로 참여했던 ‘경성사단 대연습 종군기’ 글에서는

시종일관 흥분되고 기쁜 어조로 ‘황군만세’를 외쳤지

이름도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였어 그때 벌써 창씨 개명한 거야

그 후 <국민문학> 편집기자로 있을 때

그 잡지에 ‘항공일에’를 발표했는데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온 바람!”

 

이 시는 일제의 전쟁동원을 독려했던 항공일의 기념시였는데

그 당시 일본 문학인들이 40년대 최고의 시라고 찬사를 보냈지

‘헌시-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라는 시에서도

 

“너를 쏘자 너를 쏘자 벗아

붉게 물든 너를 쏘자 벗아!

우리들의 마지막이요 처음인 너

그러나 기어코 발사해야 할 백금탄인 너!”

 

이러면서 교복과 교모는 이냥 벗어버리고

군복과 군모를 쓰고 육탄으로 전쟁터에 뛰어들라고 부추겼어

일제가 실시한 전쟁동원령을 정당화했고

조선 학생들의 학도지원병 출정을 독려했던 시였지

이보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 있을까

조선인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거리낌 하나 없었으니

‘무제 -사이판 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란 시를 보면

 

“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

희생 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

어머니여, 나 창을 들고 일어서리

배를 띄우리 싸이판으로”

 

하면서 총알받이로 나선 병사들을 찬양했고

그 또한 기쁘게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고 했으니

그의 소설 ‘최체부의 군속지망’에서는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로 큰 획을 그었다며

최체부는 떠난 달부터 꼭꼭 돈을 부쳐서 집안 살림이 궁색하지 않았다고

어머니도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궁성 요배하는 습성이 생겼다고 하면서

침략전쟁에 복무하는 것이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이라고 선전 선동했으니

2.

누군가 그랬지

시인 서정주와 인간 서정주는 다른 거라고

잠실운동장의 잔디밭에 잡초 서너 개가 있다고 해서

잔디밭 전체를 뒤집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어떤 반성도 하지 않았어

해방 후 어느 잡지에서 변명하기를

조선총동원령이 내려져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부역했다고

그런데 해방을 맞이할 때 서정주는 갓 서른이었지

그 나이에 일제로부터 압력을 받았다니 말이 돼?

그의 친일은 자발적인 행위였어 자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하여

어떤 정치인이 말했지

증조부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 반성한다고

그 시대의 역사적 아픔을 후손으로서 견딘다고

용서는 사죄에서 출발하고 반성에서 마무리되는 거야

서정주는 일장기를 흠모했던 것 같아

그의 시 ‘일장기 앞에서’를 보면

 

“이날은 대성전기념일도 축제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받은 깃대에 국기를 한번 꽂아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땀까지 흘려가며 벽장에서 국기를 꺼내어 그 깃대에 매었다”

 

참으로 놀라자빠질 지경이야 친일을 넘어서서 숭일이었지

또 그의 시 ‘마쓰이 오장 송가’를 보면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그대는 우리의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원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원수 영미의 함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었는가”

 

마쓰이는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전사한 조선 청년이었지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희생자일 뿐이야

그런데도 서정주는 사십 행이 넘는 장시로 억울한 희생을 미화했지

누구를 위한 전장이고 누구를 위한 죽음이었는지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더불어 그 당시 3대 천재 시인으로 불리웠어

이런 말이 있어

잘 드는 칼이 더 위험하다고

지극히 고운 결이 더 많은 것을 해친다고

그런 천재적인 시인이 일제에 부역하는 시를 썼다면

청년학생 동포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칠거야

그의 시 ‘스무 살 된 벗에게’와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에서도

일제의 징병에 반도의 젊은이와 어머니들이 적극 부응해야 한다고 했지

이건 친일을 넘어서 명백한 범죄행위야

앞날이 쟁쟁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았으니

그런데도 반성은 커녕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고 했다니

3.

해방 후에도 그의 권력 지향성은 계속되었지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를 자청해서 썼고

5.16군사반란을 민족의 소망이 반영된 혁명이라고 찬양했으며

베트남 참전을 독려하는 시까지 썼으니

70년대 김종필의 새마을운동 시찰단에 동행하면서

관제용 참전기를 남기기도 했고

80년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TV연설을 했고

전두환 생일에는 전두환을 ‘님’이라고 운운한 생일 축하시를 썼는데

 

“이 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와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과 두루 님께 오시나이다”

 

이런 것을 어처구니라고 해야 하나

누구는 서정주를 말할 때

시를 팔고 영혼을 팔았으며 그 고집의 대가는 달콤했다고 했지

누구는 서정주를 말할 때

시인 서정주와 인간 서정주는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지

하지만 그는 민중의 편도 아니었고 민중의 삶도 살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민중을 팔고 권력을 팔아서 호사하면서 천수를 누렸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치는 갔지만

애비는 종이었다는 천민은 갔지만

종천순일한다는 집착도 변명도 갔지만

시인 서정주는 병든 수캐마냥 오는 것인지

시-만 잘 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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