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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없으면 근대사 성립 어려워3.1혁명과 임시정부 및 독립투쟁 근원에 의암 손병희가 있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9.01.18 23:48

 

천도교 의암 손병희가 3.1혁명 구상 진행 성사

3.1혁명 민족대표 33인중 15명이 동학 천도교인

3.1혁명으로 민주공화제 대한민국 임시정부탄생

대일독립투쟁의 중심, 정의부, 화성의숙도 천도교

 

▲ 서기2019.01.16.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옆 <광화문협동조합> 의백학교에서 동학민족통일회 월례강좌가 있었다. 이번 달에는 손윤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이사장이 맡았다. 그는 이날 의암 손병희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을 중심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곧 3.1절이다. 올해는 3.1혁명 1백주년이 되는 해라 정부에서부터 각종 관련단체들이 1백주년기념 잔치를 하겠다고 바쁘다. 3.1혁명은 우리나라 근대사 큰 부분을 차지한다. 또 한국현대사를 결정한다.

3.1혁명이 우리 역사에 끼친 힘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우리 근현대사 거대한 물줄기가 3.1혁명이다. 이를 주도한 세력이 있을 것이다. 우리역사에서는 불행하게도 이 주인공을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서기2019.01.16. 서울 종로구 전철3호선 2번출구 건너편 <광화문아침> 의백학교에서 동학민족통일회 월례시민강좌가 있었다.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 손윤 이사장이 맡았다.

이날 손 이사장은 의암 손병희가 우리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을 재조명했다. 근현대사는 의암이 없으면 성립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의암이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임을 알렸다.

우리 근대사 중심이고 대 전환점인 3.1혁명을 천도교가 주도했는데 의암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3.1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동학혁명전쟁을 수행한 천도교인이 15명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을 지휘한 것이 의암이라고 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인은 자금을 내면서 참여했다고 한다. 반면에 기독교 계열 민족대표는 의암 손병희가 거금을 주면서 데려왔다고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또 3.1혁명 거사장소가 의암의 집이었고 혁명 조직과 자금도 그가 댔다고 한다. 당시 혁명을 준비할 능력은 의암이 만든 조직외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못박았다.

그는 3.1혁명으로 일제에게 희생된 사람들만 보아도 천도교 의암이 주도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전쟁이 무력투쟁이었다면 3.1혁명은 비무장 투쟁으로 나간 것이 달랐을 뿐이라고 풀었다. 그는 3.1혁명을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가장 세련된 민족해방투쟁이자 평화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의암 손병희 젊었을 때 모습이다. 그는 경세가로 알려져 있다. 역사, 정치, 학문, 경제 등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그가 내놓은 <준비시대> 서문을 보면 ''신단사천년국가神檀四千年國家' 라는 말을 쓰고 있다. 또 신성한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유교사대주의 사관에 따라 리조선은 중국인 기자를 중심에 두고 단군을 기자 들러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의암은 기자는 객客이라고 분명히 한다. 이어 우리역사 대략을 써내려 간다. 그의 역사관이 단군조선에 뿌리 박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민족사관이다. 분명한 민족사관에 터잡아 3.1혁명과 민족해방전쟁에 투신했음을 알 수 있다. 제도권 강단주류 식민사학계에 따르면 의암 손병희도 사이비역사학, 국수주의자다.

의암이 주도한 3.1혁명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으로 이어진다. 손 이사장에 의하면 초대 대통령을 의암이 맡았다. 또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최동오가 맡는데 천도교인이다. 최동오는 대동청년회를 조직하고 의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 만주에 화성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독립투쟁에 나선다. 이 학교는 당시 만주일대에서 정부역할을 하던 정의부가 주도했다. 설립자금이 천도교에서 나왔다고 한다.

동학혁명과 관련하여 새로운 주장도 나왔다. 손 이사장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남접과 북접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지 않다고 못박았다.

북접만 있었고 남접이 설사 있었다 치더라도 북접이 지휘소지 남접은 실체가 없었다고 분명히 했다.

동학혁명군의 최고지도자는 해월 최시형이었는데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에게서 북접주인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동학혁명 전개 과정을 보면 서기1893년 3월 최시형이 통문을 내려 보은에서 동학민회를 연다.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를 내걸었다.

안으로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평안케 하며 밖으로는 왜구와 서양오랑캐를 몰아내는 의를 내걸었다는 뜻이다. 사실상 이 때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남접이 실체가 없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일본군 보고서에 ‘남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서호포 대접주 서장옥 위치를 알려주는 용어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또 전봉준을 심문한 일본군 자료를 보면 “최시형으로부터 첩지를 받기는 했으나 남접은 잘 모른다”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또 동학혁명을 주도한 곳은 보은이고 이곳에서 동학민회가 탄생했고 북접대도소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동학혁명중심지가 보은이었다는 것이다. 전라도가 중심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잘못되었음을 꼬집었다.

서기1885년 2월 전후해서 최시형이 보은에 북접도소를 설치한 이후 1895.12.24. 동학군 해산에 이르기 까지 동학혁명의 시작과 끝이 보은이라고 잘라 말했다.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선 윤덕영. 경술국치를 주도하여 일제로 부터 자작작위를 받는다.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리조선은 왕족도 대거 가세하여 팔아먹은 나라였다. 한쪽에서는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버렸고, 또 한편에서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라를 팔아넘겼다. 윤덕영이 고종앞에서 버티고 서서 매국서명을 할 때까지 압박하며 기다렸다는 일화는 유명하여 오늘날 까지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다. '아방궁'이라는 말이 있는데 윤덕영 저택을 두고 한 말로 유명하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하여 윤덕영이 주도한 것으로 나와 거듭 경악케 한다.

손 이사장은 이러한 역사사실을 토대로 동학혁명 중심을 보은으로 자리매김하겠다고 포부를 내비쳤다.

서기2019.01.19. 보은에서 동학혁명북접사업회 창립총회를 굳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역설했다. 현재 전국에 수많은 동학혁명기념관련 사업회가 활동 중이다.

각 단체가 각기 자기가 중심이라고 외친다. 그에 따르면 보은에서 나온 북접사업회가 중심이고 정통성을 갖고 있다. 동학관련 역사를 바로 잡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편 3.1혁명으로 태극기가 본격 사용되었다. 태극기는 이후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투쟁의 상징물이 되었다. 해방공간에서도 남쪽은 물론 북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탄생 전 까지 민족을 상징하는 표지였다.

손 이사장은 천도교 의암이 주도한 3.1혁명에서 민족 구심점으로 태극기가 사용되었다면서 통일조국에서도 태극기가 국기로 사용되는 것이 맞다고 역사해석을 내놨다.

이날 그동안 여러 설로만 떠돌았던 고종독살설도 밝혀졌다. 손 이사장은 서기1919.01.22. 의암이 내놓았다는 <격고문>에 나오는 말을 끌어왔다. 고종을 독살한 자가 왕족인 윤덕영이었다고 밝혔다. 한상학과 함께 독살을 주도했다.

<격고문>을 보면 “윤덕영, 한상학의 두명 적신賊臣으로 하여금 황제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에게 부탁하여 밤에 황제가 드시는 식혜에 독약을 섞어 잡수시게 드리니 이를 드신 황제의 옥체가 갑자기 물과 같이 연하게 되고 뇌가 함께 파열하셨으며 구규(아홉구멍)에 피가 용솟음치더니 곧 세상을 떠나셨소이다.” 라고 나온다.

의암 손병희는 이 격문을 뿌리며 울분을 토한다. 국민대회 소집을 포고한다고 외친다. 이것이 3.1혁명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손윤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 이사장이 강연을 하는 가운데 참석한 동민회 회원들과 시민들이 강연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

한편 이날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이이제이 꼭지를 다루었는데 19세기 전후반에 걸쳐 서양열강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히며 이이제이 술책이 보인다고 전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침탈당한 것도 이 이이제이 전법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 ‘최초의 가짜 뉴스’라며 리승만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백범이 해방 후 환국한 뒤에 의암 묘역을 방문한 일화를 소개했다. 이 때 백범과 함께 간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씨 통곡을 전한다.

엄씨가 의암 무덤을 부여 잡고 통곡했는데 이 때 흐느끼며 한 말이 의암 손병희의 가치를 증명한다.

'의암 정신을 마시고' 독립투쟁에 나섰음을 암시하고 있다. 해방이 외세힘으로 되어 의암 선생의 뜻을 받들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있다. 백범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1945.11.29. 11시~ 김구 주석 일행, 손병희 선생 묘역 방문’ 으로 제목을 단 <자유신문> 서기1945.11.30. 기사를 소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선전부장 엄항섭씨, ‘우리 민족의 영웅 의암선생의 묘지를 성묘하는 뜻이 천도교에 헌신하신데 있다고만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민족의 투사인 선생의 영혼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근원의 물을 우리들이 마시어 이 강산을 지키지 못하고 환국한 오늘..’ 하고 복받처 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여 말을 끊는 엄선전부장의 흐르는 눈물”

백범일행은 의암 손병희를 "우리민족의 영웅, 민족투사" 라고 받들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의암을 이렇게 보고 있다. 그가 근대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강연에 앞서 송범두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이 인사말을 했다. 갈등과 분열로 삭막한 한국사회인데 서로 조금만 양보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 화합, 통합된 따듯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강연회에는 동학민족통일회 회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대거 참여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손 이사장은 이날 3.1혁명 1백주년과 관련해서 오는 3월 1일에 만개북을 울리는 행사를 진행한다고 알렸다. 이념과 종교를 떠나 모든 시민이 함께 참여하여 3.1정신으로 통합, 하나되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행사는 아침 11시 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광화문일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덧붙였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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