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구검의 각석 기공비 가짜 논란...

역사에는 항상 흥망성쇠와 영욕이 교차한다.

신완순 / 한울빛새움터 원장

 

900년간 동북아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였던 고구려 또한 마찬가지다. 찬란한 문화와 영토를 자랑했던 강성제국 고구려였지만 치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 동천왕 때 위(魏)나라 변방의 장수인 관구검(毌丘儉)에게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을 도륙당한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수치로 여길 것이다.

고구려는 정말로 일개 위나라의 변방의 장수인 관구검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당하였을까? 그리고 위나라는 과연 지금의 압록강 주변에 있는 길림성 집안현(輯安縣)에 각석기공비를 세웠는가?

고구려, 위 변방 장수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중국은 후한이 멸망하고 위‧촉‧오의 삼국이 쟁패를 하고 있었으며, 요동지역에는 공손(公孫)씨가 자리를 잡고 고구려와 위나라 그리고 오나라와 외교적 줄다리기를 하는 등 국제관계가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보면 위나라와 고구려 전쟁에 관한 본말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요동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지만 역적 발기(發歧)가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에게 항복한 뒤 공손씨의 소유가 되었다. 공손탁은 스스로 요동왕(遼東王)이라 칭하였다. 공손씨는 요동지역을 요동(遼東)과 요중(遼中), 요서(遼西)의 세 지역으로 나누고 한때는 산동성 일부지역까지 차지하는 등 강력한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에게는 눈엣가시였고 고구려와는 적국이었다.

공손연(公孫淵, 공손탁의 손자)때에 이르러,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간사한 꾀로 위와 오 두 나라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오의 임금 손권에게 사신을 보내 신하라 칭하고 위나라를 함께 치기로 하였다.

이에 손권이 공손연에게 군사를 보냈는데, 공손연이 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미끼로 삼기 위해 오나라 장군 등을 죽이려 하자, 이들은 고구려로 도망가서 고구려와 연합으로 공손씨를 치자고 하여 동맹을 맺었다.

오나라의 이런 계략이 고구려를 속여 자국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 고구려 동천왕은 손권이 보낸 사신 호위(胡衛)를 억류하다가 결국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내고 위나라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즉 고구려가 공손연을 치면 위나라가 돕고 위나라가 오나라를 치면 고구려가 돕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두 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위나라가, 공손연의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동맹으로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치자 동천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에게 수천의 군사를 주어 보내어 결국 요동의 공손씨는 3세 50년 만에 멸망 하였다. 공손씨가 멸망 하자 여위동맹(麗魏同盟)에 의하여 당연히 요동지역을 고구려에 땅을 돌려주었어야 함에도 위나라가 배신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자 동천왕이 노하여 위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 위나라를 공격을 하였다. 위기를 느낀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침략한 것이 바로 본말이 생략된 채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 기록이다.

여위동맹(麗魏同盟)으로 공손연 멸망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기사는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 권30 ‘동이열전 고구려 조’와 권28 ‘관구검 열전’, 그리고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도 여러 기록이 혼용이 된 채 기록을 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권28 ‘관구검 열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시(正始) 중(240~249년)에 위나라가 고구려에게 여러 번 침략을 당하여 이에 관구검이 여러 군사들을 지휘하여 보기 1만 명을 이끌고 현도(玄菟)를 출발하여 여러 길을 따라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고구려의 왕 궁(동천왕)은 보기 2만 명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비류수(沸流水) 상으로 가서 양구(梁口)에서 대전을 벌였다. 궁이 연달아 쳐부수고 달아나자 관구검은 마침내 말과 수레를 묶어 환도성에 올라 고구려 수도를 도륙을 내고 1천 명을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중략) ... 궁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자 관구검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 6년(245년)에 다시 고구려를 정벌을 하였다. 궁이 매구(買溝)로 달아나자 관구검이 현도태수 왕기(王頎)에게 추격하도록 하였다. 옥저 땅 1천 리를 지나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였으며 환도산에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겼다. 8천 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논공을 하여 상을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라고 하여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 전체를 도륙을 내고 고구려의 왕은 도망을 가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한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였다. 2만 명의 군사로 관구검의 1만의 군사를 비류수에서 대파를 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라고 되어 있어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승리하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위나라 관구검과의 1차 전쟁은 <삼국지>에 나오는 ‘비류수’와 ‘양구’에서 고구려가 대승리를 하였던 것이다.

고구려 동천왕, 위와의 1차 전쟁 대승...2차엔 허 찔려

동천왕이 허를 찔린 것은 2차 전쟁이었다. 1차 전쟁의 승리에 대한 자만과 전쟁의 계책을 간하는 신하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내어주고 작전상 후퇴를 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패배한 전투가 아니었다. 비록 환도성이 불타는 쓰라린 패배를 당하였지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밀우(密友)와 유유(紐由)라는 두 장수가 있었기 때문에 대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밀우와 유유의 활약상이 잘 나타나 있다. 밀우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위나라의 군사에 맞서 싸우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퇴하는 임금의 퇴로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유유는 적진으로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을 하려 하니 위나라 장수 왕기(王頎)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왕기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왕기가 죽자 위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으며 동천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자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중국 측의 사서인 <삼국지>에는 이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상내약외(詳內略外, 중국 측의 사서 기술 방법. 자기들이 유리한 것은 상세하게 기술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하게 하거나 생략하는 것)하여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위, A4 정도 크기의 돌에 40자를 새겨 승리를 기념?

2차 전쟁에서 위나라가 일시적으로 환도성을 점거를 하였지만 결국 위나라 현도태수 왕기가 유유에게 피살되고 겨우 도망을 갔음에도 저들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전쟁에 승리한 기념비를 돌에 새겼다고 하고 있다.

1906년 현 중국의 길림성 집안현 판석령(板石嶺)에서 발견되었다는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는 길이 약 25.8㎝, 너비 약 26.4㎝이며, 비문의 서체는 예서체이고 각 글자의 간격은 약 2.7㎝이다. 중국측에서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한 전쟁에 이긴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관구검의 고구려 약탈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배를 받아온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위나라가 승리를 하였고 각석기공을 하였다면 겨우 A4 크기 정도의 돌에 새겼겠는가? 또한 돌에 새겨졌다는 내용 또한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긴 하지만 겨우 40여 자 남짓한 글자로 환도성을 불태운 엄청난 일을 다 기록을 할 수 있겠는가?

사서의 기록에는 환도산에 ‘불내지성’이라고 새겼으며 숙신의 남쪽에 각석기공을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 길림성 집안은 옥저 땅 1천 리를 거쳐 지나간 지역도 아니며 숙신의 남쪽은 더더욱 아닌데도 각석기공비가 출토되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1906년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되었다는 관구검의 각석기공비 - A4 용지 정도의 크기에 불과한 돌에 과연 공적을 새겼겠는가? 이는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든 가짜 각석기공비이다.>

동천왕이 공격한 요동의 서안평과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이 압록강 유역이 아닌 이유는 1차 전쟁 때에 승리한 비류수와 양구가 이 지역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수(梁水)는 <대청일통지>에 현 산서성 장자현(長子縣) 동쪽에 있다고 하였고, <태평환우기>에는 고구려와 관구검이 전투를 벌인 곳을 비류수와 문수(汶水)라 하였는데, 문수는 산동성 태안부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라 하고 있다.

또한 <요사지리지>에 서안평은 요(遼)나라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라고 하였는데, 현 압록강 주변이 요나라 상경이었던 적이 없으며 많은 학자들은 현 북경 북쪽에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만든 영제거가 있던 송나라의 북경지역 대명부(大名府)인근이 요나라 상경임황부였다고 하는 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요 상경임황부 주위에 흐르던 강인 어하(御河)가 바로 영제거였던 까닭이다.

“안평은 제나라의 읍이며 지리지에 탁군에 안평현이 있다(安平齊邑按地理志涿郡有安平縣也)”라고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에 주석을 달고 있으며 탁군(涿郡)은 대명부 지역으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안평의 서쪽에 있었던 서안평은 현 하북성 찬황(贊皇)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양수(梁水)가 있는 산서성 장자현 서쪽의 안읍(安邑)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마의가 요동 공손연을 공격한 곳은 지금의 산동 내양현(萊陽縣)지역인데 지금도 그곳을 고려산(高麗山)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태평환우기>와 <명일통지> 등에 기록되어 있고 <산동통지>도 마찬가지다. 이로 미루어보면 고구려와 위나라가 싸운 서안평과 비류수와 양구 등은 지금의 압록강 주변이 될 수 없고 현 하북성과 산서성 그리고 하남성 접경 유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송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 권83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고 그 남은 무리들을 영양(滎陽, 하남성 낙양 근처)으로 옮겼다.”라고 한 대목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동천왕시기 고구려가 위나라와 오나라 그리고 공손씨와의 국제관계에서, 오나라 사신의 목을 치고 위나라와 함께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배신한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고, 관구검과 싸웠던 그 지리적인 배경은 현 압록강 주변이 될 수 없다.

고구려는 능동적으로 국제관계를 주도할 수 있는 힘과 외교력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정과 백성이 국가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일치된 국가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환도성을 불태운 후 위나라는 20년 만에 나라가 망하였지만 고구려는 그 후로도 4백여 년 이상을 패자로 군림하였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환도성이 불탔던 쓰라린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하며 또한 그러한 위기의 국난에도 대역전에 성공한 고구려의 저력을 이어받아 한낱 자그마한 돌덩이에 글을 새겨 역사를 왜곡하려는 중국의 저의를 분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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