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사교과서에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어떻게 들어가 있나 짚어본다.

기사수정: 서기2018.06.09. 07:38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부여는 지금 처럼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 만주에 있었나

고구려 발상지, 졸본은 과연 만주 환인현인가

한나라 군대와 싸운 서안평이 압록강 하구 건너 단동일대였나

모두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 식민사관에서 말하는 서안평은 현재 북한 압록강 하구 건너 단동일대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 1차사료인 <요사> 지리지는 중국 내몽골자치구 파림좌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중국과 일본에 팔아먹는 강단식민사학자들 외에 바른 역사를 찾겠다고 열심히 뛰는 인물들 중에도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인사도 눈에 띈다. '민플러스'라는 진보매체에 연재를 하고 있는 박경순이라는 역사저술가다. 그는 한사군 하나인 현토군, 졸본, 부여, 서안평 등을 식민사관으로 편찬된 국사 교과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 역사는 그 나라 국민정신을 만든다. 특히 국사교과서라는 책을 통해서 국가가 전 국민을 상대로 가르친다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어린 학생들부터 교육한다면 미치는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국사책은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우리 역사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상, 고대사가 궁금하다.

1.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에게는 아주 이질감으로 다가오는 역사를 초반부에 다룬다. 소위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다. 조선(단군) 서쪽 변경 끝자락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일을 마치 우리역사 머리 부분인 양 다루어 주입시키고 있다.

더구나 그 사건이 본래 일어난 지역이 아닌, 우리나라 북쪽 서북한 지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른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 특히 낙랑군 위치다. 낙랑군은 중국 식민통치기관이다.

일제는 우리역사가 중국 식민통치로 시작했다고 날조했다. 이런 사관이 우리 국사책에 스며 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역사를 축소, 왜곡하여 낙랑군 위치를 현재 북한 평양일대로 본다. 현행 국사책이 이것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자.

서기2007년도 교학사 판 중학교 국사교과서 33쪽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 성장을 얘기하면서,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남으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후,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이 표현을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4세기 초 북한 평양에 있는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을 몰아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삼국사기> 미천왕조에는 “서기313년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 왔다”고 나온다. 이 기록을 왜곡해서 평양에 있는 낙랑군을 고구려 미천왕이 멸망시키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했다고 한 것이다. 이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라는 단체가 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위시하여 전국 대학교 고대사 전공한 교수들이 회원으로 있다. 이들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이 부분을 뭐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역시 서기2007년 교학사 판 49쪽을 보자. 삼국정치 발전편 고구려 부분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책에는 아예 낙랑군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미천왕 때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는 것은 앞서 밝힌 서기313년에 미천왕이 낙랑군 포로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다는 것에 터잡은 말이다.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는 것은 멸망시켰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국고대사학회는 멸망시켰다고 한다. 위 중학교 국사교과서와 표현만 달랐지 같은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은 결코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낙랑군 포로 2천여명을 사로잡아왔다고 한다. 이 고등학교 국사책 서술은 북한 평양에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낙랑군은 북한 평양에 있었던 것일까. 먼저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자. <사기> 조선열전 초반부에 나온다.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1천여 인을 끌고 왔다. 상투를 틀고 만이복장을 해서 동쪽으로 국경을 넘어 패수를 건너 진나라 옛 빈 땅인 상하장에 거주하면서 진번, 조선 만이를 점차 복속했다. 결국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고 도읍을 왕험이라고 했다."

"주석8: 색은에 따르면 지리지에서 낙랑에 운장이 있다. 주석9: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동쪽에 있다."

(満亡命,[七]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八]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王之,都王険. [九] [八]索隠案:地理志樂浪有雲鄣. [九]臣瓚云「王険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사기/조선열전)

이 기록을 보면 위만이 망명자들과 함께 최종 도착한 곳은 진나라 상하장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왕험성을 도읍으로 했다. <사기> 조선열전 주석에는 낙랑에 운장이 있다고 한다.

본문 진나라 옛 공터인 상하장에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상하장이라고 했으니 진나라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경계는 진 장성 동단이 기준이다. 진장성 동단은 현재 하북성 난하 동남쪽 갈석산까지다(태강지리지, 진서/지리지, 통전 등)

특히 <진서> 지리지를 보면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낙랑은 한나라 때 설치했다. 6개현을 통할하고 있는데 호수는 3천7백이다. 조선현은 주나라 기자를 봉한 곳이다. 둔유현, 혼미현이 있다. 수성현에는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 루방현, 사망현이 있다(樂浪郡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낙랑군에는 수성현도 있는데 이 수성현에는 진나라가 쌓은 진장성 곧 만리장성 일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만리장성 동쪽 끝에 낙랑군 수성현이 있다는 말이다. 만리장성은 동쪽 끝은 현재 중국 하북성 산해관 서쪽이다.

또 <사기> 하본기 주석에는 태강지리지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여기에는 보다 명확하게 낙랑군 수성현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만리장성에 이어 갈석산까지 등장한다. 갈석산이 어디에 있는 지 알면 낙랑군 위치도 확인된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난하 동남쪽에 존재한다.

이런 기록은 이후 나오는 중국 다른 사료에 계속 반복해서 등장한다. 낙랑군이 북한 평양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1천 수백 킬로미터 덜어진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은 그 동쪽은 우리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현재 요하를 건너 더 훨씬 서쪽까지 우리 역사 강역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제는 낙랑군을 북한 평양에 갖다 놓음으로써 이 광활한 땅을 모두 중국에 팔아먹었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의 초라한 땅만이 우리역사 강역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 국사책이 그대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부여는 어디에 있었나

그렇다면 우리 국사책은 부여를 어디에 갖다 놓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 49쪽을 보면 부여를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로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사기> 화식열전에 의하면 부여는 연나라 북쪽 인근에 오환과 함께 있다. 부여가 연나라 북쪽에 있다는 얘기다. 연나라는 그럼 어디에 있었는가. 발해와 갈석사이에 있다고 한다.

발해는 현재 하북성 천진시 바다인근이다. 갈석은 갈석산으로 하북성 난하 동남쪽이다. 부여가 이 연나라 북쪽에 있다고 한다(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北鄰烏桓, 夫餘 사기/화식열전).

또 <한서> 지리지에는 부여는 연나라 수도인 계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또 주석에는 구체적으로 부여위치를 말하고 있다. 부여는 장성북쪽에 있는데 현토로부터 1천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薊, 南通齊、趙, 勃、碣之間一都會也 北隙烏丸、夫餘師古曰:「薊縣, 燕之所都也. 勃, 勃海也. 碣, 碣石也.」 師古曰:「訓際是也. 烏丸, 本東胡也, 爲冒頓所滅, 餘類保烏丸山, 因以爲號.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夫讀曰扶.」한서/지리지)

또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 동이전에는 부여가 장성 북쪽에 있고 현도군과는 1천여리가 되며 남으로는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또 북쪽에는 약수가 있고 방이 2천여리라고 한다(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裏,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裏 삼국지/위서/오환선비동이전).

부여 위치를 가장 객관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중국 정사인 1차사료에는 일관되게 부여가 장성 북쪽에 있다고 한다. <사기>/화식열전의 연나라 북쪽 부여 위치와 통한다. 그런데도 우리 국사책은 부여가 현재 만주 길림성에 있다고 그려놓고 있다.

▲중국 요령성 조양시 원대자 고분군에서 발견된 벽화다. 묘 주인이 고구려 태왕을 상징하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백라관은 중국 <구당서>,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태왕이 쓰는 관이라고 나온다. 똑 같은 벽화가 북한 안악3호분 고구려 벽화묘에서도 발견된다. 벽화에서 주인공이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위 주변에 다시 선으로 투명색 관이 하나 더 쓰여 있다. 이것이 백라관이다.

4.고구려 발상지 졸본은 어디인가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일어나 첫 번째 도읍지는 어디일까. 먼저 앞서 언급한 중학교 국사책을 보자. 33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구려의 지배 세력은 부여 계통의 이주민이었으며,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토착민들과 힘을 합하여 나라를 세웠다(기원전37)”

이번에는 앞서 언급한 고등학교 국사책을 보자. 47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 같은 책 37쪽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인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

모두 고구려 발상지를 압록강 근처로 비정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사책은 이곳을 졸본성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졸본성이 압록강 인근이라고 한 점이다. 고구려가 이 언저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현재 만주 환인현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졸본성이 이곳에 있었을까. 졸본은 다른 말로 흘승골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현재 요하 서쪽 조양시 인근 의무려산 일대로 나온다. 여기가 고구려 중심지라는 소리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자.

"<통전>에 의하면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경에 북부여에서 동남으로 가서 보술수를 건너 홀승골성에 살았다. 나라 이름을 구려라고 하고 고를 씨로 삼았다. <고기>에 이르길,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 나와 졸본에 이르렀는데 곧 홀승골성이다. 졸본과 비슷한 곳이다."

"옛날에 대요가 망하지 않았을 때 요나라 황제가 연경에 있었는데 우리 조빙자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에 걸쳐 ‘의주醫州(의무려산이 있는 주)에 이르렀다. 이어 연나라 계로 향했다. 이러한 이유로 (졸본=홀승골성이 의무려산이라는)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주몽이 홀승골성을 도읍으로 했다."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景=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自朱蒙立都紇升骨城삼국사기/지리지."

이 <삼국사기> 기록이 진실하다는 것은 앞서 중국 1차사료에 나오는 부여위치를 볼 때 확인된다. 앞서 부여위치가 중국 진나라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것이 진실하다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태왕과 태조태왕 때 일어난 사건으로도 증명된다. 모본태왕은 중국 산서성 태원까지 진격하여 한나라를 정벌한다. 그리고 다음 왕 때 요서에 10개성을 쌓는다.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 봄, 군대를 보내 한나라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高句麗本紀2-慕本王-2年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구려본기2 태조대왕3년, 봄2월 요서에 10개성을 쌓아 한나라 병력에 대비했다(高句麗本紀3-大祖大王-3年,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지금으로 말하면 난하 동쪽 하북성 까지 고구려 강역이었다는 소리다. 그러니 고구려 중심지는 당연히 요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조양시 부근에서 안악3호분과 같은 양식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벽화도 고구려 태왕들 모습을 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다. 주인공이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주위에 선으로 그려진 관을 하나 더 쓰고 있다. 이것이 요하 서쪽 조양시 원대자묘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주인공 백라관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 판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직접 1차 사료다. 현재 요하 건너 서쪽, 조양시 동쪽에 위치한 의무려산 일대가 고구려 발상지 졸본으로 나온다. 왜 이 서쪽에서 고구려 태왕 묘로 보이는 원대자 유적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사료와 고고유적이 맞아 떨어지는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5. 서안평은 어디인가

서안평은 우리 고대사에서 주요한 지명이다. 서안평이 어디냐에 따라 고구려 판도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에서는 서안평이 현재 압록강 하구 건너편 중국 단동일대라고 한다. 서안평이 여기라고 한다면 고구려는 이 서안평을 두고 중국 한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고구려 땅이 여기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중국 내몽골자치주라고 파림좌기라고 한다면 그 동쪽은 고구려 땅이 된다. 서안평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크게 달라진다. 서안평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태왕조, 동천왕조에 등장한다. 태조태왕조에는 서기146년 "가을 8월에 왕이 장군을 파견하여 한나라 요동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처자를 약탈하여 얻었다(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고 한다.

이 얘기는 중국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나온다(質,桓之閒,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양쪽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되니 역사사실로 믿어도 될 것이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조에도 서기242년에 서안평을 왕이 장군을 파견하여 요동서안평을 파괴했다고 한다(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이 기록들은 하나 같이 '요동서안평'이라고 한다. 서안평이 요동이라고 한다. 압록강 하구 단동이 요동이라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지금 따져 보아도 요동은 현재 요하 동쪽 언저리를 나타낸다.

이 기록들을 볼 때 서안평을 기준으로 당시 고구려와 한나라가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안평은 <요사>지리지, 상경부편에 의하면 임황부에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현재의 내몽골 자치주로 나온다. “상경도상경 임황부는 본래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 땅이었다. 신나라 왕망이 북안평이라고 했다(上京道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新莽曰北安平.요사/지리지/상경부).

위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 당시 요동은 현재 요하를 건너 현재 내몽골 자치주 파림좌기 언저리라는 얘기다. 이렇게 기록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 가면 고구려 윤곽이 나온다. 판도가 그려진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머릿속에 고구려 판도를 현재 요하 이동 만주지역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지리비정은 모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반도사>나 <조선사> 및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내놓은 책이나 논문이 다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식민사관을 현재 우리나라 거의 모든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역사관련 책들이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 정부가 나서서 역사 바로 잡아야한다

일제는 우리나라 역사 강역과 시간을 축소해서 반도로 가두어 놓았다. 모두 조작 날조한 것이다. 중국 1차사료에 뻔히 역사진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정적인 내용만 뽑아다가 역사를 구성했다. 그 때는 이것이 통했다. 그러나 서기21세기 지금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있고 손가락 몇 번만 두들기면 모든 1차사료가 바로 뜬다. 지금은 정보통신이 고도로 발달해서 모든 사료가 개방되어 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식민사관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버젓이 거짓된 역사를 국가가 앞장서서 전 국민에게 국사교과서를 통해서 주입시키고 있다. 일제식민지 노예사관으로 여전히 일본에 예속시키고 있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학계를 장악했다. 이들이 식민사관으로 우리 국사책을 만들었다. 우리 국사책은 아직도 일제 조선총독부 지배를 받고 있다.

수 많은 적폐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역사적폐가 가장 심각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혼돈 속에서 가치관을 상실한 채 헤매고 있다. 모두 일제식민사관의 후유증이다. 이제 실상을 바로 알고 정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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