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선인, 명립답부 좌원에서 한나라 군대 전멸시키다.

고구려 철갑기마군단, 좌원에서 한나라 군대 전멸,

한나라군대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하다...

 

 세르게이 정 / 북방고고인류학연구소장

        

고구려는 국초부터 주변국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3대 대무신왕 때(서기21년)는 북방의 강자 부여를 굴복시켰고, 5대 모본왕 때(서기49년)는 후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여 그 위용을 떨쳤다. 6대 태조대왕은 자주 후한을 공격 할 정도로 국초부터 강국의 위용을 보였다.

태조대왕이 연로해지자 이복동생인 수성이 태조대왕을 위협하여 왕위에 올라 차대왕이 되었다.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들을 죽이고 폭압정치를 자행하자, 165년 연나부의 조의 벼슬에 있던 명림답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옹립하였는데 고구려 8대 왕이다. 신대왕의 휘(諱)는 백고(伯固)로 태조대왕의 다른 이복동생이다.

신대왕은 차대왕과 달리 화합정치를 표방했다.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음의 기사는 신대왕이 화합정치를 국정시책으로 표방했음을 보여준다.

<가-1 사료>

처음 명림답부의 난이 있었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차대왕의 아들)은 도망쳐 숨어 있었다. 새 왕[嗣王]의 사면령을 듣고 궁문에 나와 아뢰었다.

“지난번 나라에 재화(災禍)가 있었을 때 신은 죽지 못하고 산골로 숨었습니다. 지금 새로운 정치를 베푼다는 말을 듣고 감히 죄를 아룁니다. 대왕께서 법에 따라 정죄하시고 저자나 조정에[市朝] 버리신다 해도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죽이지 않고 멀리 쫓아 보내신다면 이는 죽은 자를 살려서 뼈에 살이 돋게 하는 은혜입니다. 신의 소원이지마는 감히 바라지는 못하겠습니다.”

왕은 곧 구산뢰(狗山瀨) · 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주고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였다. 『삼국사기』권 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2년(166)

신대왕은 차대왕의 폭정으로 어수선해진 국정을 쇄신하는데 노력했다. 게다가 그는 일대의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가-2 사료>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패자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內外兵馬]를 담당하게 하고 아울러 양맥의 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좌 · 우보를 바꾸어 국상이라 한 것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사기』권 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2년(166)

기존의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국왕 밑에 좌, 우보를 두어 신하들을 통솔했다. 그런데 이 좌, 우보를 통합하여 국상으로 단일화했다. 국상은 왕의 명을 직접 받아 고구려 5부에 전달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이었다. 본래 고구려는 5부족이 모여 건립한 나라였던 만큼 각 5부의장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영토에 대해서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 부족의 장들인 대가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던 회의가 제가회의(諸加會議)다. 국상은 이 제가회의를 주재하는 벼슬로, 국상을 새로이 설치한 것은 국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의도였다.

▲ 고구려 개마무사와 찰갑중장기병의 모습-고구려는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내치를 다진 신대왕은 내정이 안정되자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중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정복왕 태조대왕의 동생답게 그 역시 영웅의 면모를 보인 임금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에는 그가 후한을 공략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나-1 사료>

환제 말(166~167) 선비, 남흉노 및 고구려의 사자(嗣子) 백고(伯固)가 함께 반(叛)하여 노략질(寇鈔)하였다. 사부에서 현(玄)을 천거하자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아 황월을 주었다. 현은 진에 이르러 병사를 쉬게 하며 훈련하였다. 그런 뒤에 제장을 독려하여 호노(胡虜)와 백고 등을 토격하니 모두 파산하여 퇴주하였다. 즉위 3년 만에 변경이 안정되었다. 『후한서』권51 「교현전」

고구려가 선비와 힘을 합해 후한을 공략했다는 기사다. 당시 선비에는 단석괴라는 영웅이 출현하였다. 그는 동쪽의 부여에서 서쪽의 돈황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여 선비를 부족연맹체에서 대제국으로 만들었다. 이때 선비는 동서로 1만 4천여 리, 남북으로 7천여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대왕 이전 태조대왕 시절 선비와 협력하여 후한을 공격하여 후한을 궁지에 빠뜨리기도 했다.

<나-2 사료>

4월에 왕이 선비(鮮卑) 8,000명을 데리고 (요동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니,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서 싸우다 죽었다. (그 부하)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몸소 풍(諷)을 위하여 막다가 함께 몰진(歿陣)하고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삼국사기』권15「고구려본기」태조왕 69년

신대왕은 자신의 형인 태조대왕이 그랬던 것처럼 선비와 동맹하여 후한을 공격한 것이다. 신대왕이 후한을 공격한 이유는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신대왕이 명림답부에 의해 옹립된 만큼 그의 왕권은 취약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옹립한 세력은 명림답부 외에도 관나부 우태 미류, 환나부 우태 어지류와 비류나부 조의 양신 등이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차대왕에게 왕위에 오르라 부추긴 사람들로, 차대왕을 배신하고 신대왕에 붙은 이들이었다. 신대왕으로선 이들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선 왕권을 강화해야 했고, 그 히든카드로 선택한 것이 후한공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대왕의 후한공격은 결국 후한의 보복을 불러 일으켰다.

<다-1 사료>

4년(168)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 『삼국사기』권 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4년(168)

후한이 현도태수 경림을 보내 고구려로 침입해 고구려 군사 수백 명을 죽이자, 신대왕이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는 기사? 이를 그대로 믿어야 할까? 단순히 군사 수백 명이 죽었다고 고구려왕이 직접 항복을 청했다는 것에 의문이 든다. 고구려는 5대 모본왕 때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략했고, 태조대왕 때는 수십 차례 후한을 공격했다. 이런 고구려가 고작 군사 수백 명이 죽었다고 왕이 직접 항복을 청했다? 내가 보기엔 중국 측의 고의적인 외곡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후한서』에는 의미심장한 기록이 전해진다.

<다-2 사료>

건녕 원년(168) … 12월 선비와 예맥(穢貊)이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를 침구(侵寇)하였다. 『후한서』권8 「효영제기」

선비와 예맥이 후한의 유주와 병주를 침략했다는 기사다. 예맥이 가리키는 대상은 누구일까? 그건 바로 고구려다. 예맥족은 지금의 만주와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을 일컫는 말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를 포괄하는 단어다. 『당대조령집』은 예맥이 곧 고구려를 가리키는 말이라 지칭하고 있다.

▲대청광여도-시계방향으로 병주,유주, 산해관, 태원(산서성)-고구려는 이 지역을 공략하였다.

<라-1 사료>

島夷陪禮 虐弑基君 毒被朝鮮 災流穢貊(도이배례 학시기군 독피조선 재류예맥) 『당대조령집』 「평란 파고려조」

위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시기에 고구려를 지칭하는 용어로 조선과 함께 예맥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순암 안정복 선생이 지은 『동사강목』에도 후한서와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라-2 사료>

겨울 12월에 고구려와 선비가 한(漢)의 유(幽)ㆍ병(幷) 두 주(州)를 침범하였다. 『동사강목』 제1 하 무신년(신라 아달라왕 15년, 고구려 신대왕 4년, 백제 초고왕 3년, 한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

『후한서』의 선비와 예맥이 유주와 병주를 침구했다는 기사와 『동사강목』의 고구려와 선비가 유주 병주를 침범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공하자, 신대왕이 후한군을 물리치고, 선비와 연대하여 후한에 반격을 가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선비와 함께 공격한 유주와 병주의 위치는 어디일까? 유주는 지금의 북경과 천진 일대이고, 병주는 하북성과 산서성 태원 일대이다. 만주지방에 있던 고구려가 저 멀리 산서성까지 원정을 나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대왕 이전 모본왕 때 이미 산서성에 진출한바 있다.

<마-1 사료>

2년 봄에 왕이 장수를 보내어 한(漢)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侵襲(침습)케 하더니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채동(蔡彤)이 은의(恩誼)와 신의(信義)로써 우리에게 대하므로 다시 (한과) 화친하였다. 『삼국사기』권14「고구려본기」3 모본왕 2년

한 줄 밖에 안 되는 기록이지만,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북평, 어양, 상곡은 지금의 북경 인근지역이고, 태원은 산서성의 중심도시다. 고구려가 건국한 지100년도 안되었는데도, 저 먼 산서성까지 공략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강력한 군사를 보유했다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 지역과 고구려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증거일수도 있다. 은의와 신의로써 대하기 때문에 화친했다는 기록은 아마 삼국사기가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감안해보면 한나라가 고구려의 공격에 놀라 애걸복걸하며 군사를 거두어달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아마 고구려는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함으로써 한나라로부터 침공하지 말라는 의미로 막대한 보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고구려가 공략한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는 태조왕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마-2 사료>

3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城)을 쌓아 한병(漢兵)을 방비하였다. 『삼국사기』권15「고구려본기」3 태조왕 3년

이 기록은 고구려가 요서를 차지하여 그 곳에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요서를 차지했다면 언제 차지했을까? 그건 앞서 모본왕 때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한 기사로 미루어보아 모본왕 때 요서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고구려는 태조왕-차대왕-신대왕으로 이어지는 내부 혼란으로 인해 요서지역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신대왕은 모본왕 때 구축한 요서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유주, 병주 원정을 감행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현도태수 경림을 물리치고 선비와 함께 유주와 병주에 진격한 고구려군이 이 지역을 차지했는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후한은 고구려가 유주, 병주 원정을 단행한 지 4년 후에 다시 고구려에 침입한다. 이 때의 침입이 4년 전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분풀이인지, 고구려에게 빼앗긴 유주, 병주를 되찾기 위한 것인지는 기록이 남아 알 길이 없다. 신대왕이 후한 깊숙한 곳에 위치한 유주, 병주에 원정을 나갔을 때 아마 후한의 영토 일부분을 잠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한은 만이의 반란, 농민들의 봉기, 환관 및 외척간의 다툼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력을 신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후한은 절치부심 때를 기다리며 국력을 키우다가 4년 후에 고구려를 재침한 것이 아닐까?

172년 후한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명림답부 열전」에는 이 때 후한군을 이끈 장수가 현도태수 경림이라 기록하고 있다. 후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고구려 조정은 어떻게 싸울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는 맞서 싸워 고구려의 저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암성에서 내려다 본 태자하 - 백암성이 얼마나 높은지 가늠해볼 수 있다.

<바-1 사료>

8년(172) 겨울 11월에 한(漢)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를 쳐들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漢)의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습니다.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요새)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경우입니다. 한의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내서 막아야 합니다.” 『삼국사기』권 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8년(172)

이에 대해 명림답부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바-2 사료>

명림답부가 말하길,

“아닙니다. 한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의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이니 이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권 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8년(172)

명림답부가 내놓은 안은 청야수성견벽전이었다. 이 청야전술은 고구려의 대표전술이 되었고, 훗날 수나라 대군에 맞서 을지문덕이 구사한 전략이었다. 어떤 군대든 전쟁을 오래 끌면 사기가 저하된다. 명림답부는 이를 간파하여 철저한 수성전을 제기한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 참전한 정천숙은 고구려는 성을 잘 쌓아 깨뜨리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고구려의 축성술은 동아시아 최고였다. 고구려는 성 주위에 깊은 해자를 파고, 성벽의 보루를 높여 적이 넘어올 수 없도록 만들었다. 고구려의 성이 얼마나 높았나 하면 백암성은 최소 10m, 요동성은 20m에 달했다.

▲ 고구려 백암성

신대왕은 국상 명림답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청야수성견벽전으로 후한군을 상대하였다.

<사-1 사료>

왕이 그렇게 여겨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인(漢人)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다. 한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사기』권 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8년(172)

고구려의 청야견벽수성전으로 주위에서 식량을 얻지 못한 후한군은 시간이 갈수록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식량부족과 사기저하로 후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는데, 그들을 고이 보낼 고구려군이 아니었다. 고구려군은 후한군을 공격하여 단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런 사실은 『삼국사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중국사서에는 한 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시 후한이 이를 치욕스럽게 여겨 기록에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좌원전투의 패배는 후한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당시 후한은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과 외척간의 권력다툼이 한창이었다. 거기다가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나라 살림은 엉망이었고, 이들 기득권세력들은 농민들을 쥐어짜 농민봉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어렵게 힘을 키워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했으니, 당시 후한조정은 비상에 빠졌을 것이다.

좌원에서 후한이 고구려에 대패하자, 그동안 눈치를 보던 요동의 공손탁이 스스로를 요동태수라 칭하고 후한으로부터 독립했다. 게다가 각지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력이 궤멸된 후한조정으로서는 이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농민들의 반란 중 가장 큰 반란으로, 후한 조정 자체를 전복시킬만한 반란이었다.

비록 황건적의 난은 주모자 장각이 병으로 죽음으로써 어영부영 끝났으나 정부군이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여러 군벌이 난립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여기에 환관과 그를 따르는 1만여 군사를 칠 여력이 없던 대장군 하진이 서량의 군벌 동탁을 끌어들임으로써, 군벌들이 난립하여 후한은 종말에 이르고 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대왕의 유주 · 병주원정, 그리고 좌원대첩의 승리가 동아시아 정세를 크게 바꾼 것이다. 신대왕이 유주와 병주 지역에 원정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명림답부가 좌원에서 후한군을 몰살시킨 좌원대첩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 신대왕은 태조대왕처럼 후한의 유주와 병주를 공략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떨친 영웅이었다. 좌원대첩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판도를 크게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신대왕과 명림답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위인이고, 신대왕의 유주, 병주원정과 좌원대첩은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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