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당나라에 사람 보내 세계에 눈뜨게 되었고 선진문물 들여와 발전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도 여러 가지 의심되는 부분이 많다’

‘(낙랑군이 하북성에) 있다고 하는 것은 (한나라 때 것이 아니라) 후대 것이 아닌가’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데, 신라도 세계최고 당나라 문화 들여왔다’

 

▲서기 2017.11.21.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부산외국어 대학교 역사관광외교학부 권덕영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이날 권 교수 최치원이 당나라 관리도 했다면서 그가 쓰는 비문을 소개했다. 소중화, 사대주의 사상은 이 때 싹 텃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당나라 문물로 신라가 제 구실했다는 주장을 펴 고개를 갸웃둥하게 했다.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시민강좌가 계속되고 있다. 어려운 역사를 대중들에게 쉽게 알려 소통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학회가 말하는 신라역사와 문화라는 것이 기존의 틀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가 만들어 준 식민사학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시민강좌 강사들은 평소에 교육현장에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반복했을지 모르겠으나, 일반대중이 보면 충격 그 자체다.

이러한 현상이 서기2017.11.21. 시민강좌에서도 되풀이 되었다. 이날 시민강좌는 부산 외국어 대학교 역사관광외교학부 권덕영 교수가 맡았다. 권 교수는 이날 ‘신라 사람들의 외국여행’으로 강연을 했다. 권 교수는 신라인들이 중국을 여행했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즐기는 관광차원의 여행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견당사, 구법승, 유학생 등이 당시 당나라를 여행한 주체들이었는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강조했다. 견당사는 신라 집권층에서 정치목적으로 보낸 것이고 구법승은 불교승려들이 불교를 들여오기 위해서 였으며 유학생은 당나라 학문을 배우러 간 것이라고 했다.

▲ 권덕영 교수가 신라인의 입당행적과 그 효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나라에 들어가는 절차를 소개했다. 지금 보다 다른 특별한 절차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도 지금과 거의 같았다고 했다. 엄격한 출입국 관리가 이루어졌고 불법체류자는 색출되어 추방되었다고 한다. 신라인은 아니었지만 서기838. 일본 구법승려 엔닌(圓仁) 사례를 들었다. 또 당나라로 들어가는 길도 소개했는데 주로 우리나라 서쪽 주요 항구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고 주장했다.

이날 강연은 다음 주제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권 교수는 신라인이 여행을 통해서 ‘얻은 것이 무엇일까’라고 하며, 당나라의 일방적인 ‘對신라 수혜론’을 펼쳤다. 그는 신라가 이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고급문화를 터득하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또 생활과 사고방식도 한 차원 높아졌다고 칭송했다. 그는 당시 당나라는 문화가 완숙기에 들었다며 이를 신라가 받아들여 정신적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 당나라를 통해서 인식 지평이 넓어졌고 세상에 대한 시야도 확대되었다고 보았다. 신라가 이를 통해서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를 면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중화사상에 경도된 관점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권 교수에 따르면 당나라라는 중국이 없이는 신라는 정상적인 역사발전을 할 수가 없다. 당나라의 선진문물이 들어와서야 비로소 신라가 문명화 될 수 있고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의 전형인, 정체성론, 타율성론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조선인은 처음부터 고여 있고 고립되어 미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외래 선진문물이 들어가 비로소 미몽에서 깨어났고 역사 발전이 가능해 졌다. 이것이 조선총독부가 펼친 정체성론, 타율성론이다. 이날 권 교수는 이러한 지적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인지, ‘나를 중화사대주의에 물들었다고 비판할지 모르나 당시 당나라가 세계최고의 문물을 가지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을 사대주의자라고 불러도 할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고집했다. 그는 계속해서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며 당나라 문화는 우수하고 신라문화는 저급했다는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높은 당나라 문화가 낮은 신라문화에 흘러들어와 신라를 발전시켰다는 논리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중국 문화가 찬란했다는 주장을 한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증명하고자 했다. 한나라 시대에 벌써 도자기가 나온다며 당시 우리나라는 겨우 와질 토기니 하는 기초수준의 토기생산에 머물러 있었다고 비하했다. 또 당나라 당시 외국 사신들이 당조정에 조공을 하는 모습을 조각한 상 61개를 보여주며 그 중에서도 신라사신이 조공사로 끼여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권 교수는 당시 신라인들의 당나라 여행을 파악하는데 주로 일본자료에 의존했다. 우리나라에 자료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지만, 일본자료에 의지하여 해석함으로써 일본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 신라는 중국보다 앞선 문화가 부지기수라는 점을 무시했다는 비판이다.

▲ 권 교수는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통로를 추정했다. 서해안 주요 거점을 통해서 배타고 당나라로 갔다고 봤다.

신라는 먼저 원효라는 대사상가를 배출해 냈다. 원효는 당나라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이나 중국에서 모범교재로 삼을 만큼 탁월하고 심오한 <대승기신론소> 같은 역작을 남겼다. 또 신라 금관은 세계최고 문화를 자랑한다. 이른바 ‘황금보검’도 만찬가지다. 이제 까지 나온 그 어떤 보검보다도 우수하고 찬란하다. 이것도 외래사대사관에 따라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지역이 원조라고 하지만, 직접증거는 없다. 또 신라는 중국 당나라만 간 것이 아니다. 서역과 교류해서 최고의 문화를 꽃피웠다. 유리잔들에서 확인된다. 이른바 ‘로만글라스’라는 것이다. 이 잔들도 서역에서 발견된 것 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한편 이날 권 교수는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 위치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그는 이날 부산에서 강연하러 서울로 오기 전에 오전에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강의를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식민사학을 지적하는 질문에 응하면서는 답변을 회피했다. 그래서 “질문에서는 무엇이 식민 사학인지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밝혔는데, 교수님은 식민사학은 거의 극복되었다고 만 할 뿐 구체적인 사례는 들지 않았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 주시면 고맙겠다”고 재차 요구했다.

이에 권 교수는 구체적인 사례는 들지 않고 “그러면 식민사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먼저 말씀해 보시죠.”라고 오히려 질문자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이 시민강좌를 열고 있는 강사들이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을 한 결같이 북한평양이라고 하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따르고 있다’고 지적해 주었다. 이에 권 교수는 “낙랑이 일반적으로 평양에 있다고 얘기를 안 합니까.”, “삼국사기 초기기록도 여러 가지 의심되는 부분이 많죠.” 라며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이에 앞서 권 교수는 자신은 이 분야를 깊이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다른 기회에 이 분야를 강의하는 강사가 있으면 그에게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답변을 회피했다.

그러나 권 교수가 대답한 것을 보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낙랑은 평양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또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의심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이는 낙랑군=평양이고, 삼국 초기 역사는 의심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이다. 심지어 그는 낙랑군이 중국 하북성에 있다고 하는 사료들은 후대에 나온 낙랑군이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이는 이른바 이치론移置論을 의미한다. 이치론 까지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권 교수가 낙랑군 위치가 어디인지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권 교수는 자신은 깊이 연구를 하지 않았다면서 모른다고 발뺌했다. 지난 강사로 나선 경희대학교 교수 조인성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

▲ 권 교수는 이날 신라가 당나라 선진문물 덕에 발전 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권 교수 포함 이 시민강좌를 개최한 한국고대사학회 주장처럼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을까. 당시 중국 원사료는 북한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규정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중국 하북성, 오늘날로 말하면 북경 동남 쪽, 천진시 동북쪽에 있었다고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낙랑군과 가까운 패수가 진나라 공터 근처에 있다고 한다(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또 <한서>에는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서 현도와 낙랑을 군으로 삼았다고 한다(東過碣石以玄菟、樂浪爲郡). 여기서 갈석은 현재 하북성에 있는 갈석산을 말한다. 또 <진서> 지리지는 한나라 때 설치한 낙랑군 수성현이 진나라 장성이 일어나는 곳에 있다고 한다. 진장성이 일어나는 곳은 역시 현재 중국 산해관을 넘지 못한다(樂浪郡漢置 遂城秦築長城之所起). 이외에 <태강지리지>, <통전> 등에서도 이같은 기록이 확인된다.

이들은 이런 명백한 역사기록을 무시하고 북한평양에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이 있었다며, 조선총독부가 가르쳐준 것을 72년 동안 전 국민을 상대로 주입시키고 있다. 이는 동북공정과도 일치하는 것인데 북한 땅을 중국에 팔아먹는 역사범죄를 국가로부터 인력과 재정을 지원받으며 저지르고 있다는 비판이 그래서 쏟아진다.

이날 권 교수는 질문시간에 답변을 회피 및 제대로 답을 못해서 구석에 몰렸다. 이것을 다 지켜본 강좌 실무를 맡은 한 간사가 지나가면서 엉뚱한 반론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쓰다소키치 식민사학자는 <일본서기>를 믿지 않는다. 이는 (민족사학계도) 쓰다 의견에 동의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그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한다고 할때는 그것이 틀렸다고 하면 모순 아니냐는 식으로 따졌다. 그래서 그것은 별개의 사안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왜 그런지 더 자세하게 대답하려고 했으나 그는 이미 저 만큼 지나가고 없었다.

한편 이날도 지난번 강연에 대한 비평문을 나눠주었다. 한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분은 별것 아니라면서 ‘피닛 쵸코바’ 과자를 건네면서 “잡수세요”라고 하며 격려했다.또 시민방청객 두 분은 한번은 식수대에서 정말 낙랑군이 중국 하북성에 있는 것이 맞냐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지금 하북성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고 자세하게 물었다. 그래서 북경 동남쪽, 천진시 동북쪽이라고 설명했다. 이 분들은 이제 막 낙랑군에 관심이 생겼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만큼 이 분야가 어렵게 알려져 왔고 생소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 어떤 여성방청객은 처음 오는지 비평문에 번호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이전 것들도 모두 보고 싶다며 갖다 달라고 했다. 이날도 늘 그러듯이 거수경례로 인사하는 분이 반갑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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