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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국 교수, 주체만 바꿔 임나일본부설 주장하다‘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는 우리나라 남부 가야를 말한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7.11.10 11:03

 

노중국 교수,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과 대방군 평양과 황해도에 있었다’

‘가야사에서 수로왕이라고 부르는데, 그렇지 않다

‘왕이 아닌 낮은 단계 수장이었을 것이다’

‘고고학은 찌꺼기 학문이라고 한다’

 

▲ 서기2017.11.08. 경남국립김해박물관에서 노중국 전 계명대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강연에서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과 대방군이 우리고대사를 주도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나올 법한 주장들이 대한민국 국가기관 안에서 또 터져 나왔다. 서기2017.11.08. 김해국립박물관에서 계명대학교 노중국 명예교수가 거침없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펼쳤다. 노 씨는 이날 ‘대가야와 백제’를 주제로 강연했다. 노 씨는 강연에서 우리역사 말살에 광분했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주장한 것을 거의 그대로 대변했다. 그는 먼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을 문제 삼았다. 김수로‘왕’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가락국이 나라로 부를 정도로 크고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다.

근거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터 잡은 ‘신라 사로국 성장론’을 들었다. 신라도 처음에는 왕국이 아니었는데 점차 주변세력을 통합하면서 왕국이 되었다는 논리다. 이렇기 때문에 신라는 초기에는 왕이 아닌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낮은 세력을 지칭하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명칭을 쓰다가 마지막에 왕을 썼다고 했다. 대가야 가락국도 마찬 가지라는 것이다. 가락국왕인 김수로에게도 왕국 수장을 뜻하는 왕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했다. 대신에 중국 삼국지 삼한전에 나오는 명칭을 끌어왔다.

그는 김수로왕에게 붙여줄 이름이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온다면서 신지, 험측 등의 수장 이름을 열거했다. 이 중에서 낮은 단계 명칭인 ‘험측’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했다. 나눠준 시민강좌 책자에 ‘신지’도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지워달라고 꼭 집어서 부탁했다. 신지는 김수로왕의 가락국 보다 더 큰 세력의 수장이름이라고 했다. 노 씨에 의하면 신지는 작은 나라 12국을 거느린 변한의 수장이름이다. 수로왕의 가락국은 변한 12국 중의 하나 정도로 아주 작은 나라니 ‘신지’칭호를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노 씨의 주장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중국 <삼국지> 삼한전을 맹신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말하는 김수로왕의 가야는 대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왕국이다. 나라 수도를 뜻하는 경도京都를 말하고 있고 새로이 궁궐을 지어 이사하기도 한다. 더구나 궁궐을 감싸는 나성羅城까지 등장한다. 또한 탈해와 싸울 때는 수군 전함 5백척까지 동원하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은 김수로의 왕국이 단순히 마을 몇 개가 모인 고을 수준의 촌락사회가 아님을 뜻한다. 충분히 왕이라고 부를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노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기록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가짜다. 모두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따른 결과다.

한편 한 세력이 대소, 강약에 따라 수장의 명칭이 다르게 불렸다는 주장도 비판을 받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신라가 신라로 나라이름이 바뀐 것은 힘의 강략이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중국 문화가 들어오면서 한자식으로 바꾼 것뿐이다. 이날 가야 명칭들도 도마 위에 올랐다. 앞서 노 씨는 고령가야를 대가야라고 했다. 그러면서 원래는 이름이 반로국이었다고 했다. 이 반로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반로’국라고 주장했다. 또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반파국’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단지 추정일 뿐이다.

노 씨는 이어 낙랑군결정론을 들고 나왔다. 한국고대사학회 같은 조선총독부 역사관 추종세력은 서기4세기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서기313년을 금과옥조처럼 다룬다. 이때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게 잇달아 멸망당했다고 한다. 우리역사를 주도했다던 낙랑군, 대방군이 망함으로써 그 후유증과 파장이 전 한반도에 미쳤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이날 노 씨도 이 같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고대사회에서 서기4세기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없어진다” 면서 평양과 황해도 지역에 있던 이 두 군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 결과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의 백제가 마주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 파장으로 남쪽에서는 마한이 백제로 편입되고 진한도 사로국이 통합해가면서 신라가 생겨났다고 했다.

다만 낙동강일대의 변한사회는 통일왕국이 되지 못하고 여러 개의 가야사회로 접어든다고 강조했다. 중국 식민지, 낙랑군과 대방군의 파급효과가 이렇게 컷다는 것이다.

노 씨는 이어 광개토태왕비문을 끌어왔다. 소위 서기4백년 조에 광개토태왕이 이끌고 온 고구려군이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내려왔다고 하면서 이 사건을 가야와 연결시켰다. 이어 ‘임나가라’의 ‘임나’가 가야라고 했다. 그는 질문시간에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을 빌어 이 임나가 임나일본부설에서 말하는 그 임나라고 인정했다. 또 일본서기 신공기49년 조를 사실로 보았다. 다만 김현구 전 고려대 교수처럼 주체만 야마토왜가 아닌 백제라고 조건을 달았다.

▲ 노 중국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김수로왕의 가락국을 촌락사회 수준으로 격하시켜 설명했다. 왕이라고 붙여서는 안되고 그 보다 낮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했다. 변한 12개국 중의 아주 작은 연맹체 집단으로 보았다.

노 씨는 일본서기 신공49년조를 주체 빼고 그대로 믿는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사료에 대가야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혹시 있을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이 일본서기를 무조건 신뢰하지는 않고 비판해서 본다고 강조했다. 신공49조에는 야마토왜의 신공‘황후’가 왜 장군들을 시켜서 가야7개국을 평정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평정한 지명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탁순’도 나온다. 노 씨는 이 탁순이 현재 대구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신공49조에는 야마토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가 왜 군대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백제군대였다며 이 군대가 육로를 통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이날 노 씨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 구도를 설정해서 양진영이 이해관계에 따라 치고받고 싸우는 역사를 그렸다. 그런가하면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대가야가 신라와 동맹 맺어 백제에 대항했다고 했다. 결국 대가야는 백제 편을 들다 신라에게 서기562년에 공격 받고 망했다며 가야 역사를 정리했다.

특히 이날 노 씨는 가야가 처음 해외로 나가 중국 남제에게 작위를 받았다고 하면서 중국 갈 때 스스로 힘으로 가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가야는 선박기술과 통역들이 없었기 때문에 백제 도움을 받아 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추정근거로 신라가 중국에 간 사례를 들었다. 서기521년 법흥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백제 도움을 받아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서기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개로왕이 피살되고 수도가 함락되는 등 약해진 틈을 타서 대가야가 재기했다고 했다. 이 때 여세를 몰아 중국 남제 왕에게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앞뒤 모순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편 노 씨는 이날 낙랑군=평양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가운 질문을 받았다. 중국 사료는 하나같이 낙랑군이 중국 하북성 갈석산, 진장성 끝자락에 있다고 하는데 어째서 북한 평양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노 씨는 그것은 ‘이치移置’된 것을 말한다고 잘라 말했다.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나중에 이곳으로 이사 왔다는 뜻이다. 낙랑군위치가 갈석산, 진장성 지역이라고 하는 사료들이 보이는데 이는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이사 온 뒤에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바로 반박 당했다. 중국 <한서>, <진서>, <통전> 등을 보면 낙랑군이 중국 하북성 갈석산, 진장성 지역에 있다고 하면서 분명히 한나라 때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결코 어디서 이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날 노 씨가 주장한 낙랑군 이치론은 이미 1백여 년 전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복무한 일제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주장했다. 서기1913. 경에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내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조선반도사>에서 중국 사료 <자치통감>을 인용하여 교치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자치통감>에 나오는 기록은 하북성에 있던 낙랑군이 인근지역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임이 증명되었다.

이날도 지난주 강연한 강연 비평문을 배포했다. 여러 시민들이 반갑게 받았다. 다음 강연은 한규철 경서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가 맡는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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