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식민사학 가소로운 아이들과 <한겨레21>은 조선총독부 역사관 대변인들인가

<진짜고대사>
낙랑군은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제1부)

글 :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사료 몰이해로 엉뚱한 주장을 하는 강단식민사학자들
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식민․노예사관을 벗어나야

 

<한겨레 21>은 지난 6월 21일자 기사에서 국조 단군의 초상화와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 사진을 표지에 내세워놓고 ‘사이비역사학의 역습’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편집장 길윤형은 ‘국뽕 3각연대’라는 칼럼을 통해 정치인들과 역사학자는 물론 독립운동가 후손들까지 공개적으로 모독하고, 조롱했다. 최근에는 <진짜 고대사>라는 제목으로 강단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역사적 사실인양 기사화 하고 있다. 엊그제 8월 9일자에는 자칭 ‘젊은역사학자 모임 연구자’라는 기경량의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는 글을 실었다. 한겨레의 친일․매국행위가 도를 넘고 있다. 기경량의 글을 반박한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995.html 참조

 

기경량과 강단사학계에 묻는다.

1. 낙랑국과 대방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2.『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는 어디에 있는가?
3.『진서』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라고 하였다. 이들 지역의 위치가 하북성인가? 한반도인가?

▲ <지도 1> 필자가 비정한 낙랑군 위치

『삼국지』에 기록된 3세기 무렵의 동아시아 정치체들의 위치. 당시 한반도 북부에는 한민족의 낙랑국과 대방국이 존재하였고, 하북성 북경일대에는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존재하였다. 특히 당시 고구려의 강역은 사방 2천리였다. 고구려의 동쪽에 옥저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로 2천리가 되려면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까지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중국 군현의 가장 동쪽인 요동군은 하북성 지역을 넘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정사인 『진서』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 식민사학계는 요동군을 요령성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렇게 비정하면 요동군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강역은 『삼국지』에 기록된 사방 2천리는 고사하고 사방 800리도 나오지 않는다. 강단 식민사학계는 고구려의 강역을 1/5이하로 왜곡․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에 계신 고구려의 선조들이 통곡할 일이다.

1.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당연하다.

기경량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도 ‘낙랑군 평양설’로 인식했으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다산 정약용 등 수많은 실학자들도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했다. 낙랑군 평양설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든 왜곡의 산물이 아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기록이 존재하며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돼왔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철저히 허위다.”

강단사학계는 식민사학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평양설’이 고려시대부터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렇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낙랑군 평양설’로 인식한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 평양은 고려 서경을 가리킨다. 고려 서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특히 최근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 국책사업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찾는 연구를 하면서, 고구려 평양성이자 고려의 서경은 현 요령성 요양시 일대라는 수많은 사료를 제시한바 있다.

평양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낙랑군 평양설’을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군 한반도 평양설’과 같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또 조선 초의 권람을 시작으로 조선 중.후기의 홍여하, 이익, 신경준, 박지원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은 ‘낙랑군 재요동설’을 주장해왔다. 그러므로 ‘낙랑군 재평양설’이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돼왔다’는 기경량의 주장은 거짓이다.

‘낙랑군 평양설’을 통설로 대못을 박은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였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할 목적으로 실증사학을 빙자하여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을 조작하여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지역으로 역사왜곡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친일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였고,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및 그 제자들이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낙랑군 평양설’을 확대 재생산 하고 있다.

그들은 학문권력을 이용하여 조선총독부의 식민․노예사관을 국․검정 역사교과서의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으로 정함으로써 올바른 우리 역사가 밝혀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도 교육현장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의 혈세로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의 동조자를 양산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6월4일자에 기경량, 안정준, 김재원 등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도종환 후보자님 ‘위대한 상고사’는 안 됩니다.”라는 것이다. 담당 기자가 “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라고 물었다.

안정준 :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재원 : “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경량 : “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

위의 인터뷰에는 강단사학계의 관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낙랑군 평양설’은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는 것이다. 100년 전이면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 설 무렵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꺽고 식민통치를 쉽게 할 목적으로 실증사학을 빙자하여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을 조작하여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지역으로 역사왜곡하여 통설로 확정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 강단사학계에서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핵심근거는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낙랑 유물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이라는 비판을 하는 것이다. 강단사학계가 이러한 비판을 듣기 싫다면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낙랑 유물이 아니라 ‘낙랑군 평양설’을 인정할 만한 다른 사료들을 제시하면 될 일이다.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당연한 것이다.  

2.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많이 있다.

기경량은 2015년 11월 16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동북아특위) 주최로 열린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학술대회에서 이덕일 소장이 『한서』와 『후한서』의 주석을 1차 사료라고 한 말실수를 가지고 장황한 비판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낙랑군 하북성설’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들은 많다. ‘낙랑군 하북성설’의 1차 사료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회남자』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고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부목의 땅에 이른다(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

“갈석산은 요서계 바다의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碣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회남자』「시칙훈」(고유 주)

『회남자』는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劉安, ? ~ BC 123)이 편찬한 백과사전의 일종이다. 위만조선이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책이므로 『회남자』의 기록은 위만조선에 대한 생생한 1차 기록이다. 위 『회남자』의 글에 동한시대 학자인 고유가 주석을 달았다. 고유 역시 낙랑군이 존재할 때의 학자이다. 『회남자』와 고유의 주석을 통하여 갈석산으로부터 한나라 낙랑군 낙랑현(조선현)을 지나는데, 갈석산이 요서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낙랑현(조선현)이 요서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2. 『산해경』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산해경』권18, 해내경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산해경』권18, 해내경(곽박 주)

『산해경』은 선진시대의 지리서로 조선이 존재하던 시기의 1차 사료이다. 조선이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의 동해 안쪽은 현 중국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조선(낙랑군)은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 있었다.

3. 『잠부론』

“옛날 주 선왕 때 역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 가까이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커다란 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한韓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遷居海中).” 『잠부론』권제9, 지씨성제35

“(상략)...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한성의 동쪽을 지난다. 『시경』「한혁장」에 이르기를 “저 커다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았네. 왕께서 한후에게 추와 맥을 주시니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네.”라고 하였다. 정현은 말하기를 “주나라가 한후를 봉하니 한성에 거하여 후백이 되었다. 험이의 핍박으로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였다. 왕숙은 말하기를 “지금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 세상에서는 한호성이라 이르는데 옳지 않다.”고 하였다...(중략)...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거마하로 들어가므로 바다에는 이르지 못한다((上略)...聖水又東南逕韓城東, 『詩韓奕章』曰:溥彼韓城, 燕師所完,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鄭玄曰:周封韓侯, 居韓城為侯伯, 言為獫夷所逼, 稍稍東遷也. 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 世謂之寒號城, 非也...(中略)...又東南流注于巨馬河而不達于海也).” 『수경주』권12, 성수

『잠부론』은 후한 사람 왕부(王符, 85?~ 162)가 저술한 책이므로 낙랑군이 존재하던 시기의 1차 사료이다. 『잠부론』에서 “그 후에 한韓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는 구절을 통하여 고조선의 왕검성이 한성韓城의 서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수경주』등에 의하면 한성韓城은 탁군 방성현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하북성 탁군 방성현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와 같이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여럿 있다. 그리고 이덕일 소장이 『한서』나 『후한서』에 붙은 주석을 1차 사료라고 한 말은 잘못이지만, 주석들이 1차 사료가 아니라고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서』나 『후한서』를 주석한 당나라 시대의 사람인 안사고나 이현 등은 모두 중국 정사에 정통한 당대의 대학자들로서 중국 군현인 낙랑군의 위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었다.

이들보다 500년 후의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나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의 주장보다는 훨씬 비중 있는 사료들이다. 이덕일 소장이 제시하는 사료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으며, 어떻게 우리 역사를 올바로 밝히는데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기경량처럼 그것이 1차 사료냐? 2차 사료냐? 하는 말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토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것으로 우리 역사를 올바로 밝히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2부에서 계속).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