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학회는 왜, 신라 5세기 이전은 강좌에 넣지 않았나

 

신라는 언제 국가체제를 정비했나

진흥왕 순수비로 알려진 비석들 모두, 과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이 세운 것인가

 

단양적성비라는 것이 있다. 충북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 적성 안에서 서기1978.01.에 발견되었다. 총430자 중에 알아 볼 수 있는 글자는 309자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 비가 언제 건립되었느냐를 가지고 다툼이 있는 모양이다. 이 비석이 고대사분야이기 때문에 한국고대사학회내에서의 다툼일 것이다. 첫 번째 견해는 진흥왕 12년인 서기551년으로 본다. 두 번째 견해는 적성비에 나오는 관등을 기준해서 진흥왕 6년인 서기545년 이전으로 본다. 마지막 세 번째 견해는 앞의 두 견해를 절충해서 진흥왕 11년인 550년이라고 한다.

이 같은 주장이 서기2017.09.19.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개최하고 있는 시민강좌에서 소개되었다. 이날 이영호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체제정비와 진흥왕의 영토확장’ 이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맡았으면서 나온 말이다. 이 교수는 이날 신라 24대 진흥왕의 업적을 소개하면서 진흥왕 순수비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진흥왕대의 신라국력과 진흥왕의 활약상을 그렸다. 그가 다른 비석은 충북 단양의 단양적성비, 경남 창녕의 창녕비, 서울경기에 걸쳐 있는 북한산의 북한산비,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의 황초령비,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의 마운령비, 경기도 파주 적성면의 감악산비다.

이 교수는 이 모든 비가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면서 세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양적성비는 한국고대사학회의 주장과 다르게 나와 재검토 논란이 예상된다. 이날 이 교수는 이 비석이 진흥왕대라고 하면서 주제어를 제시했다. 군주軍主, 당주幢主, 사인使人, 소자小子, 경위京位, 외위外位 등이다. 이 용어들이 신라 진흥왕대에 나오는 것임으로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들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찾아보면 진흥왕 때에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군주는 벌휴이사금2년 때인 서기185년에 나온다. 다음으로는 지증마립간 6년인 서기505년에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는 곳에서 나온다. 진흥왕15년 서기554년에 나오기는 하지만 딱 한번이다. 이것만으로 따져보면 이 단양적성비의 년대가 서기2세기 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런데 한참 뒤인 진흥왕 때 세워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다음으로 당주를 보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문무왕 때 사용되고 있다. 문무왕 8년 서기669년이다. 또 신문왕 4년 서기681년에도 등장한다. 사인은 또 어떤가. 김유신전에 등장하지만 이미 박제상 때 등장한다. 실성왕 원년 서기402년에 사인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경위와 외위는 문무왕14년 서기476년 처음 등장한다. 이들 용어는 진흥왕 때는 나오지 않는다. 이 비문에는 대사 大舍라는 관직도 나온다. 이 용어는 유리이사금9년인 서기32년에 17관 등제를 정비하면서 12관등 이름으로 나온다. 진흥왕 때는 정작 나오지 않는다.

▲ 경북대학교 사학과 이영호 교수는 이날 시민강좌에서 진흥왕 순수비를 천자가 관경을 둘러본 징표라고 풀었다. 그러나 순수의 '수'자가 사냥하다의 수狩로 비석에 새겨져 있어, 이게 정확한 풀인지 의구심이 제기된다. 저 지도는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것이다.

역사사실이 이러함에도 이날 이 교수는 이 단양적성비가 당연히 진흥왕이 세운 것으로 전제하고 설명해 나갔다. 신라가 낙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금관가야를 정복하고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보는 창녕비도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앞서 밝힌 데로 진흥왕이 세웠다는 증거로 이 비석에서도 몇 가지 용어를 제시하는데 찾아보면 나오지 않는다. 당주나 대사 모두 진흥왕 시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군주만 딱 한번 나올 뿐이다. 비문에 신사辛巳년을 561년으로 해석해서 진흥왕22년이라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이날 소개한 북한산비는 진흥왕이 세운 것은 맞지만 정확한 연대를 주먹구구식으로 정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이 교수는 북한산비가 진흥왕 29년 서기568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비문에 남천군주南川軍主라고 쓰여 있는데 진흥왕 29년조에 北漢山州를 폐하고 南川州를 설치했다는 기록과 맞아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북한산이 진흥왕29년조의 북한산과 같은 산으로 본 결과다. 이에 따라 비문의 남천이 진흥왕 29년조의 남천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북한산과 진흥왕29조의 북한산은 전혀 다르다.

현재 북한산은 소중화 조선 후기에 들어서야 나타나는 이름이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소중화 조선 후기에 머문다. 김정희(1786-1856)가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에서 처음 북한산이라는 말을 썼다. 이후 일제침략기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공식 지명으로 썼다. 그 전에는 삼각산으로 불렸다. 고려시대부터 삼각산이 등장하는데 고려의 4악중의 하나로 불렸다. 소중화 조선 종중 때에도 5악 중의 하나로 삼각산이 나온다.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했다. 인수봉 뒤에 튀어 나온 바위가 마치 어머니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진흥왕조에 나오는 북한산은 현재의 북한산이 결코 아니라는 소리다.

이날 이 교수가 진흥왕이 세웠다는 비석 중에 주요 비석에 이 처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과연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 맞느냐.” 라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 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재조사가 요구된다.

한편 이날 이 교수는 신라가 체제정비를 한 때를 지증왕 때로부터라고 주장했다. 지증왕 때 와서 신라로 국회를 확정했고 법흥왕대 와서 병부, 사정부를 설치하고 유령을 반포했으며 불교를 공인했다고 한다. 진흥왕 때는 품주를 설치하고 화랑도를 또한 설치했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신라가 체제를 정비한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보면 수긍도 가지만 한편으로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된다. 앞서 밝힌바와 같이 신라는 분명히 서기32년인 유리이사금 9년에 17관등제를 벌써 정비했다. 국가관등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때 사용된 관등 이름이 진흥왕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교수는 서기6세기나 되어야 체제정비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도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이 교수는 신라가 진흥왕 때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을 지적하며 연호를 쓰면서 비로소 독립국가가 되었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그 전에는 연호를 쓰지 않았으므로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말도 된다. 질문시간에 이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이 있었으나 명확하게 답변하지 않고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 이 교수는 이날 방청객으로 부터 진흥왕도 연호를 썼는데, 우리나라도 단군기원으로 연호를 쓰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이 교수는 이미 국제화시대, 세계화시대에 들어섰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본이 연호를 쓰고 있는 것을 의식해서 인지,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써왔다면서 꼭 일본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편 이 교수는 진흥왕 비석에 나오는 순수비의 ‘순수巡狩’라는 말과 관련해서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 했다. 순수는 황제나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진흥왕이 스스로 황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순수비는 중국 천자만이 세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왜 순수비를 세웠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했고, 이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며 ‘인문학이라는 것은 여러 견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러한 발언을 뒤집는 행위를 강의 시작 전에 보여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 강좌에서도 지난번 강의 비평문을 나눠줬다. 이 교수에게도 주었다. 그런데 반응이 아주 부정적이었다. 강좌실무자들과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강의시작을 알리는 실무자가 이전에 없던 안내말씀을 빌어 주최 측의 공식허락을 받지 않으면 동영상촬영을 할 수없다고 했다. 기자가 나눠주는 비평문이 눈에 가시가 된 것이다. 사료에 근거한 정당한 비평을 허용치 않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이날 비평문을 받아가는 방청객들의 반응은 예전처럼 뜨거웠다. ‘수고한다’는 말은 일상이 되었고, 이번에도 ‘지난번 것 있느냐’고 요청했다. 또한 주최 측의 갑질을 염두에 두었는지 지나가면서 기자에게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한편 순수비와 관련해서 비석에는 사냥하다, 수렵하다의 수狩를 쓰고 있다. 그런데 신라본기 진흥왕조에는 지킨다는 수守자를 쓰고 있다. 이는 뜻이 완전히 다르다. 진흥왕은 국가를 수호, 지킨다 뜻으로 관경을 돌아본 것이다. 그런데 비문은 짐승을 사냥하러 나간 곳을 표시하기 위해서 비석을 세운 것으로 읽혀진다. 다음 강의는 ‘동아시아 국제전과 신라의 통일’을 주제로 전 서울대 교수 노태돈 씨가 맡는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