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는 모두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으로 통한다

 

제도권 식민사학계,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모두 낙랑군 덕택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는 말이 있다. 이탈이아 로마가 세상의 중심이고 가치기준이라는 말로 풀이된다. 물론 이는 서양 중심, 서양 우월주의 세계관에서 나온 아주 건방진 말이다. 그런데 우리역사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로마처럼 명시된 문장은 없으나 사실상 존재한다. “한국사는 모두 낙랑군으로 통한다.” 이다. 이 낙랑군은 서기전 108년경에 중국 한나라가 소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식민통치기관이다. 그것도 북한 평양지역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이런 것은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우리는 다 배웠다. 명시하여 이렇게 쓰고 있지 않고 있지만 낙랑군 식민통치 사실을 간접적으로 실어 놓고 있다. 그래서 눈치를 채지 못한다. 이 국사책을 쓴 주된 세력이 한국고대사학회다. 이들은 고대사 연구현장에서 ‘한국사는 모두 낙랑군으로 통한다’는 관점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소위 삼한과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우리 고대국가세력이 낙랑군 선진문물로 성장했다는 식이다. 낙랑군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혈 받지 않으면 제대로 된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서기2017.09.13. 경남 김해시에 위치한 국립김해박물관과 한국고대사학회가 주도하는 ‘한국고대사의 재발견’ 시민강좌에서 이 같은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날 제2강을 맡은 영남대학교 정인성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정 교수는 이날 ‘변한과 낙랑군’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정 교수는 한국고대사학회를 겨냥해서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낙랑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라고 한다고 날을 세웠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충격을 넘어 경악할 정도다. 삼한사회 문질문화가 변동되었는데 낙랑군 때문이고,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토기문화 변동도 낙랑군 영향이다. 특히 현재 김해지역이라고 하는 변한지역 와질토기도 낙랑군 영향을 받았다. 고인돌이 어느 날 사라졌는데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멸하고 평양에 설치한 낙랑군 묘장제도가 들어와서 그렇게 된 것이다. 또 복합사회가 출현하고 성장하는 것도 낙랑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고대사가 낙랑군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 축복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식민사관이다. 이것을 타율성론이라고 한다. 자율적, 주체적으로 역사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외부의 지배, 통치, 보호를 받아야 성장,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다.

▲서기2017.09.13. 국립김해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의 재발견' 시민강좌 2강이 있었다. 정인성 경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기존의 학계가 고대사를 낙랑군을 기준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했다.

정 교수 이날 강연에서 이런 논리를 반박하는 자료를 쏟아냈다. 이 논리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상시시켰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에 의문을 갖고 토기를 중심으로 반대 근거를 찾아 연구해온 과정을 들려주었다. 먼저 정 교수는 이날 강연주제가 정해진 사정부터 알려주었다.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주최 측에서 정해주었다고 했다. 낙랑군이 경남 김해 지역의 역사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으로 강연을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다른 박물관에서 학술토론이나 강연 때도 비슷하게 이어졌다고 했다.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진행된 학술발표 제목이 ‘백제성장과 낙랑대방’이었고, 그전에도 ‘마한사회성장과 낙랑’이었다고 했다. 올 초에도 ‘마한지역의 성장과 낙랑군’으로 잡고 다른 박물관에서 발표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날 정 교수는 이런 강의 주문을 뒤집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먼저 자산이 일본 유학시절에 연구한 토기류 이야기로 시작했다. 도쿄대학교 지하실에 일제가 평양 토성리 일대에서 발굴했다는 낙랑토기류들이 여러 개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이것을 밤잠 안자면서 분석하고 연구했다고 했다. 조사 결과 변한지역에서 나오는 토기와 시기가 달랐다. 변한지역의 유물이 낙랑군 유물보다 시기가 훨씬 높게 나왔다고 한다. 이는 낙랑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 이 지역에 나온 철기가 낙랑군에서 전수받은 기술로 제작한 것이라 하는데 이것도 틀렸다고 했다. 낙랑군 시기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나왔다. 이 지역서 나오는 청동검도 낙랑군이 전한 기술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아니라고 했다. 역시 제작 시기가 낙랑군 설치당시보다 더 올라간다고 했다. 그는 또 사천과 늑도지역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가지고 기존의 통설을 반박했다. 출토 물에는 쇠는 물론이고 조개, 구슬도 있다. 조사해 보니 구슬은 중국 전국시대에 유행한 것이고 조개는 오키나와가 원산지로 밝혀졌다. 기존 통설에 따르면 이것도 모두 낙랑군에서 나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처럼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 김해시민들이 몰려와 시민강좌를 듣고 있다. 평균 연령대가 6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부자가 함께 온 경우도 있었다.

토기류도 중국 전국시대의 연나라 것과 같다고 했다. 분포도 요서와 만주 그리고 우리나라 까지 미친다고 했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을 말해주는 것인데 연나라 토기를 고조선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했다. 변한지역에 중국제 유물이 나오는 것은 무역교류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강유역에서 나오는 백색토기도 기존 통설이 낙랑군 영향 받아서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중국 산동성에 가서 조사해보니 산동이 원산지로 나왔다고 했다. 거기에 토기를 굽는 가마터가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오키나와 유물 탐사를 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특히 눈길끄는 것은 고조선식 세형동검 조각이다. 이는 고조선과 교류를 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기존의 통설인 고조선 영역도 수정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통설은 고조선이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에 국한 되었다고 하는데 만주지역으로 더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정교수가 내놓은 주장은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은 강단식민사학계가 보면 기절할 노릇이다. 완전한 통설로 고착되어 더 이상 이론이 없는데 이것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정교수는 이것을 의식해서 인지 표현을 상당히 완곡하게 했다. 선입견을 갖고 있으면 낙랑군 영향설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며 근본적으로 다시 조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새로운 자료가 나왔다고 해서 기존의 굳어진 견해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며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정인성 교수는 이날 이른바 '중국계 유물'이 한반도 주요지점에 다수가 발견된다고 하면서 이는 교류의 산물이라고 했다. 특히 낙랑군과 관련이 없는 것들이라고 하여 낙랑군 영향받아 이후의 역사가 발전했다는 기성 제도권 식민사학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정교수의 이러한 기존학설을 깨기 위한 열강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냈다. 기존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낙랑군=북한평양 등식을 그대로 인정했다. 낙랑군=평양설은 고대사를 왜곡, 날조하는 뿌리다.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그는 자신이 왜 낙랑군을 평양으로 보는지 이유를 댔다. 낙랑군을 평양으로 보기 까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고 했다. 자기도 한국인이기 때문에 만주나 요서에 낙랑군을 갖다 놓고 싶다며 낙랑군=하북성을 주장하는 민족사학계 입장을 동정했다. 그러나 고고유물을 아무리 분석하고 진위를 가리고 연구해 보아도 평양으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없다고 했다. 정 교수는 또 역사발전에 핵심역할을 하는 철기 등이 모두 밖에서 들어와 우리 철기문화가 되었다는 논조를 유지했다. 이는 전파 주체가 낙랑군에서 전국시대 연나라 등 외국으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해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날 강좌에도 지난번에 이어 비평문을 나눠줬다.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처럼 ‘지난번 비평문도 있냐’며 달라고 하는 분도 있었다. 이날도 지난번 강연에서처럼 박물관 측의 취재방해가 있었다. 초상권, 저작권법에 위반된다며 동영상 촬영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강좌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한 중년여성이 기자의 얼굴가까이서 집중 찍기 시작했다. 그 여성 얼굴에는 증오와 보복심리가 가득했다. 이를 보다 못한 역사의병대 오병관 선생이 제지하려 하자 도망갔다. 오병관 선생이 그 여성을 쫓아가서 붙들어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오병관 선생이 박물관 측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그 여성을 쥐 잡듯이 잡았다고 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 정인성 교수는 이날 기존의 학설을 깨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연구성과로 우리 고대사에 대한 '낙랑군 축복론'은 일정 부분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기자도 강당 앞으로 나가서 방청객을 향해 박물관 측의 취재방해를 설명하고 부당함을 알렸다. 정인성교수에게도 ‘당신도 취재목적으로 동영상 찍는 것 반대하느냐’며 따졌다. 정교수는 ‘동영상 찍는 것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는 가운데 방청석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강좌가 중단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박물관 측에서는 더 이상 기자를 방해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강좌를 뒤에서 서서 듣던 임학종 박물관장에게 따졌다. 임 관장도 초상권 운운하며 변명으로 일관했다. 박물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취재를 방해 한 것으로 보였다. 다음 강좌는 인제대학교 이영식 교수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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