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식 교수, 우리에게 불리한 건 부풀리고, 유리한 것은 유령취급하다

 

‘대륙에 새긴 우리 선조, 동이족 역사는 우리 것 아니다’

동이족을 중국 진수가 엮은 <삼국지>에 나오는 것만 가지고 해석하다.

우리 역사를 반도에 우겨넣다

 

“안용복이 아니었으면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없을 뻔했다.”

안용복이 일본 가서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우리 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서기2017.09.12.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제3회 한국고대사 시민강좌에서 하일식 연세대 교수가 이 같이 말했다. 하 교수는 이날 ‘삼국 사람들은 말이 서로 통했을까’ 로 강좌를 펼쳤는데, 질의응답시간에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묻지도 않은 독도문제를 꺼내더니 이렇게 주장했다. 안용복이 독도에 침입한 왜인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이 때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고 했다. 하교수는 ‘안용복이 없었다면 독도를 (지금) 우리 땅이라고 하기가 참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안용복 이전에는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만약에 안용복이 일본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독도가 일본 것이라고 하는 일본 극우파 정권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

▲ 서기2017.09.12.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하는 시민강좌 제3강이 열렸다. 한국고대사학회 장인, 하일식 연세대학교 교수는 우리민족의 시간과 공간을 줄여 반도에 가두어 놨다.

이러한 독도 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하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고대사학회가 주도하여 그린 동북아역사지도집에 독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백지도에는 물론 섬이 자동적으로 나와 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비롯한 민족사학계에서 동북아역사지도집을 만들면서 한국고대사학회가 독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맹공격을 퍼부었다.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사학이라고 까지 비판을 하고 있다. 이에 동북아역사지도집을 그렸던 인사들이 반격에 나섰는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백지도에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자연물 독도가 자기들이 그린 것이라고 한다. 동북아역사지도집은 말 그대로 역사지도집이다. 역사성이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자연물 독도에 시대마다 우리 강역이라고 인공적으로 표시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독도를 그린 것이 된다.

그런데 각 시대별로 이런 표시를 전혀 하지도 않고 독도를 그렸다고 국민을 또 다시 속이고 있다. 지도집이 문제가 되어 국회까지 나섰을 때 당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지도집 부실판정을 근거로 독도를 다시 그려오라고 수정기간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정본에도 전과같이 전혀 독도를 그려오지 않았다. 이는 경악한 사건으로써 한국고대사학회의 입장은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님을 알 수 있다.하긴 이 지도집 제작을 총괄했다는 동북아역사재단 배성준 위원은 그의 논문에서 ‘독도가 우리 땅 일까’ 라며 그렇지 않다는 논조를 펼친바 있다.

이런 일련의 큰 틀을 볼 때 이 지도집 제작에 참여한 한국고대사학회 인사들과 기타 인물들 포함 수십 명은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 교수도 동북역사지도집 제작에 한국고대사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하 교수가 독도가 안용복 아니었으면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 말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13년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접수한 이래<삼국유사>,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성호사설> 등 독도를 우리 땅으로 볼 수밖에 없는 기록이 차고 넘친다.

▲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등, 우리 사료들은 독도를 울릉도와 연계시켜 기록하고 있다. 울릉도 어느 위치에서 보면 독도가 보인다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 에도막부는 일본 오키섬에서는 전혀 감지가 안되고 독도에서 보인다며 일본땅이 아니라고 했다.

한편 하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도 이번 시민강좌 제1강에서 경북대 주보돈 교수가 예고했듯이 반도식민사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삼국인들이 서로 말이 통했는가’를 주제로 강연했는데 초반부에서부터 우리민족의 기원과 공간을 반도와 만주일대로 가두어 놓았다. 먼저 하 교수는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으로 시작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여러 종족의 피가 혼혈된 상태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막연하게 고조선이 우리역사의 시작이라고 언급했지만 각론은 없었다. 그 냥 막연한 것 자체였다. 이는 단군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비록 3대 이야기 형태로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분명히 단군이 이끈 조선이 나온다. 적어도 1천9백8년을 지속했다. 이 기록만 보면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으로 시작한 것이 맞다. 이 기록을 남긴 일연은 자신이 추측해서 쓴 것이 아니다. 당시에 있던 사료를 전거로 내세우고 있다. 먼저 <위서魏書>를 소개하며 당시 기준으로 볼 때 2천년이 된 단군의 조선이 있었는데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며 중국 요임금 때와 같다고 한다. 우리 사서가 아니라 중국 사서에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 교수는 이렇게 단일민족일 수 있는 근거는 무시하고 피가 섞인 채로 우리민족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뒤에 가서는 애매한 주장을 펼쳤다. 종족과 문화가 비슷한 상태에서 국가가 달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흐름이라고 했다. 우리민족의 분포와 명칭에서도 축소와 분열로 일관했다. 동이족을 말하면서 <삼국지>만을 인용했다. <사기>나 <한서> <후한서>에서 묘사하는 동이족은 우리민족과 상관없다는 관점을 고수했다. <삼국지>에는 오환선비동이전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동이전에 나오는 내용만 동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동이에서도 읍루나 왜는 우리민족과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나 읍루의 전신은 숙신인데 숙신은 조선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와 한가지다. 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유전인자로 따져봐도 현재 일본인 80%이상이 우리와 같다고 나온다. 하 교수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도 일제 조선총독부 관학자들이 비정한대로 따랐다. 모두 현재 우리나라 경상, 전라, 충청도에 그렸다. 이 삼한의 소국들이 성장하고 합쳐져서 백제와 신라가 나왔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는 계속 지적하지만 조선총독부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하 교수는 신라의 경우 발전과 성장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게 보았다. 특히 중국 <양서> 신라전에 나오는 신라모습을 기준으로 신라를 판단했다. 이에 따르면 신라는 외교관계에서 백제 붙어 다녔다. 백제가 아니면 중국과 사신교환을 할 수 없을 정도다. 하교수는 이를 토대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신라 개국년도를 부정했다. 고구려가 제일 발전했고 그 다음에 백제니 신라는 이 두 나라보다 늦게 나라가 섰다는 주장이다. ‘삼국이 말이 통했을까’ 라며 물음으로 시작된 이번 강좌는 삼국이 말이 통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 초반에 말이 통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발언이 너무 강해 이러한 결론은 명확하게 인식되지 못했다.

▲ 하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간에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이 없었다고 했다. 이런 시각은 전형적인 조선총독부 사관으로 알려져 있다.

하 교수는 주보돈 교수처럼 삼국시대에 삼국이 동족의식이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로 싸우느라고 정신없는데 무슨 동족의식이 있었겠냐’는 논리다. 그런데 하 교수는 강의초반에 우리민족이 종족과 문화가 비슷하다고 했고, 삼국이 말이 서로 통했다고 했다. 이는 같은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더구나 하교수의 사관에 따르면 우리는 반도 안에서 주로 역사를 이어왔다. 현재 이 땅은 고립성과 협소성 때문에 피가 덜 섞이는 지정학 구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동족의식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따른다. 한편 이날 하교수는 동북공정도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인 것만 동북공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도 어떤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역사 시작부터 중국 동북공정으로 보면 자연스럽게 한사군도 연결된다. 이 지점에서는 하교수 같은 식민주의 사관과 중국동북공정사관이 일치한다. 이 두 사관은 한사군 핵심 군인, 낙랑군이 평양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 동북공정 범위를 고구려로 한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날 강좌에서도 지난 주 대전대 이한상 교수의 강연을 학문적으로 비판한 인쇄물을 배포했다. 약1백여 명의 시민이 모인 것으로 보였다. 가져간 인쇄물이 1백장인데 몇 장씩 더 달라고 한 방청객 포함하여 모두 배포했다. 이번에는 시민들 반응이 뜨거웠다. 민족사학계에서도 ‘이런 강좌를 왜 안하냐’며 따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제할거냐며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또 어떤 분은 지난번에 기자에게 폭행을 가한 ‘노인이 안 보인다’면서 ‘왜 그냥 당하고만 있었냐, 제압해 버리지 그랬냐’며 상기된 얼굴로 거들었다. 그러면서 비평문을 나눠주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강좌 주최 측의 일방적인 자기주장에 화가 난다고 했다. 특히 1강을 맡은 주보든 경북대 교수의 극단적인 주장을 지적하며 ‘그런 것은 학술회에서 토론할 때나 어울리는 것이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분석까지 해 주었다. 이 시민은 서울 양천구에서 기업자문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늘 그렇듯이 ‘지난번 비평문은 없냐’고 묻는 시민, 이 비평문이 ‘더 재미있다’고 웃으시는 시민 등 다양한 반응을 나타냈다. 이번 강좌는 원래 고려대학교 박대제 교수가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박 교수가 몸이 안 좋아 하일식 교수가 당겨서 맡았다. 다음 강좌는 서기2017.09.14.(목) 한국외국어 대학교 여호규 교수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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