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진한유민들'이 이주한 곳은?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여덟 번째)

 

 

 

신라인들의 고향은 하북성 보정시 일대였다...

1. 역사의 수수께끼,  진한의 유민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시대를 열었던 주역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 건국하여 668년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할 때까지 992년간을 존속했던 나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던 왕조들 중의 하나에 속한다. 국호인 신라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한민족의 상고사는 고조선뿐만 아니라 삼국시대도 많은 부분이 여전히 수수께끼다. 특히 신라는 초기 신라를 형성했던 진한의 유민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는 ‘조선의 유민들이 진한 6부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후한서』및『삼국지』에서는 ‘진秦나라의 망명인들이 진한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연나라의 망명인들이 진한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 사료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초기 신라를 구성했던 진한인들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로부터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조선’ 또는 ‘낙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였으며, 한나라 낙랑군이 어디에 설치되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중국계(?) 유물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따른 이른바 진한의 위치도. 진한이 경상도에 있다. 이 지도에는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과 대방군을 황해도와 평양일대로 그려놓고 있다. 국내 식민사학계도 이를 따르고 있다.

 

2. 진한인들은 조선의 유민이었다.

『삼국사기』는 진한 사람들을 ‘조선의 유민’이라고 하였다. 관련 기록을 보자.

A-1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오르니 이를 거서간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 둘째는 돌산 고허촌, 셋째는 취산 진지촌(간진촌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 대수촌,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始祖姓朴氏諱赫居世. 前漢, 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即位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三國史記』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A-2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를 갖추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진한·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우리나라에 두 성인이 일어난 뒤 인사가 잘 닦이고 천시가 순조로워, 창고가 가득 차고 인민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낙랑·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임금께서는 겸허하게 저를 보내 우호를 닦으시니 이는 가히 예의를 넘어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시니 이는 무슨 의도이십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호공을 돌아가게 해주었다.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을 알 수 없다.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불렀다.

三十八年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囯, 比年不輸職𧴨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人民敬讓, 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諌止乃許歸. 前此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多, 處馬韓東與辰韓雜居, 至是寖盛故, 馬韓忌之有責焉. 瓠公者未詳其族姓. 夲倭人初以瓠繋腰, 度海而來, 故稱瓠公. 『三國史記』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사료 A-1에 의하면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진한 6부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오는 조선에 대하여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설을 보면 ‘조선은 평양 부근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조선’으로 이해하고, 고조선 유민의 주력집단은 위만세력에 밀려난 소위 기자조선의 유이민 또는 한나라 세력에 쫓긴 위만조선의 유민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강단사학계의 통설을 인용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이러한 해설은 잘못된 것이다. 앞으로 관련 사서들을 통하여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나오는 조선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조선의 중심지역이며, 진한 6부를 구성한 고조선 유민의 주력집단은 단군조선의 유민들이었다.

사료 A-2는 박혁거세 38년의 기록으로 기원전 20년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마한 동쪽에 자리 잡고 진한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라고 한 내용이다. 진한의 구성 집단에는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동쪽으로 피난 온 중국인들이 많이 섞여있었다는 것이다. 이 중국인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3. 진한인들은 낙랑의 망명인이다.

B-1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한의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를 피하여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중략)...낙랑 사람을 ‘아잔’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한은 처음에는 6국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뉘어졌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中略)...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東夷傳, 韓

『삼국지』(사료 B-1)는 진한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하여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낙랑 사람을 아잔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라고 한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한 사람들은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떠나온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아잔’이라 불렀는데, 낙랑인들을 ‘아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진한 사람들이 떠나 온 고향이 낙랑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잔’이라는 말에는 멀리 이국땅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정이 전해진다. 진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중국의 진秦나라에서 망명했으며, 낙랑인들을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잔’이라 불렀던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2부에서 계속)

 

글: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