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서에 나오는 여러개의 갈석산 어느 것이 진짜인가...

고대사에서 '요동'은 우리 강역을 밝힐 수 있는 중요지명,

그러나 이 지명이 요나라 시대를 기준으로

동으로 이동해 왔다는 사실을 강단식민사학계는 무시함...

 


이제 ‘구하윤해설’이 생겨난 배경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서경』「우공 13장」에 ‘구하가 이미 물길을 따른다(九河旣道)’는 구절이 나온다. 구하九河는 황하 하류를 말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황하가 하류에서 아홉 갈래로 나뉘었다는 뜻이다. 유학자들은 이 황하 하류에 있었다는 아홉 개의 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이 아홉 개의 강을 찾을 수 없자, 그 아홉 개의 강물이 흐르던 지역이 바다 속으로 잠겼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구하윤해설’이다.
 
『서경』「우공 13장」의 구하九河에 대하여 채침이 주석한 것이 위의 사료 F-2이다. 구하九河에 대한 채침의 해설이 너무 길어서 앞부분은 생략하였으나, 채침은 이 생략한 부분에서 구하에 대한 여러 사서들과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정씨程氏의 주장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씨는 주자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채침은 이 해설에서 정씨와 왕횡 및 역도원의 주장을 근거로 삼아 ‘구하윤해설’을 구체화 하고 있다.
채침의 주장에서 중요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위에서 사료 E-1, E-2에서 보았듯이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갈석산이 바다 속에 빠져서 사라져버렸다’고 하였다.  황하가 하북성 천진 방향으로 흐르면서 황하 하류 해변가는 모두 벌판으로 갈석산이라 부를 만한 산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채침은 왕횡과 역도원 등의 주장을 인용하면서도 “갈석은 산기슭과 정상을 통틀어 모두 돌이니 쓰러지거나 침몰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연주·기주 지역에는 이미 이러한 돌이 없다. 평주의 정남쪽에 산이 있는데 갈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직도 바다 속에 있어 창주의 강안과 5백여 리의 거리이며, 드높이 솟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채침이 말하는 평주 정남쪽의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가리킨다. 역도원 등이 주장한 바다 속에 빠져 사라져버렸다는 상상속의 갈석산이 5백여리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 1>에서 학자들의 상상속에서 생겨난 ‘갈석산 2’가 채침 등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을 등에 업고 난하 하류의 ‘갈석산 4’로 슬그머니 환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서경』「우공」에 기록된 채침의 주석을 통하여 본래의 갈석산이 부정되고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았다. 그 배경에는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구하윤해설’이 있었다. 그런데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에는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이외에도 두 가지 요인을 더 꼽을 수 있다.
 
첫째,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수양제와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으로 ‘고구려가 예로부터 중국 땅이었다’고 역사를 왜곡하였다.

G-1

“(상략)...배구가 인하여 아뢰기를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 때 기자를 봉하였으며, 한나라 때 나누어 3군을 삼았고, 진晉나라 역시 요동을 통치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신하가 되지 아니하고, 따로 외역外域이 되었으므로 선제께서 근심하여 정벌하고자 한지 오래입니다...(하략)’ 하였다.” (上略)...矩因奏狀曰: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於箕子, 漢世分為三郡, 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 別為外域, 故先帝疾焉, 欲征之久矣...(下略) 『隋書』卷六十七, 列傳第三十二, 裴矩傳

G-2

“『사기정의』: (朝鮮은) 조선潮仙 이음이다. 『괄지지』는 말하기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예로부터 말하기를 조선 땅이라 한다’ 하였다.” 正義潮仙二音. 括地志云:「高驪都平壌城,本漢樂浪郡王険城,又古云朝鮮地也.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사료 G-1은 황문시랑 배구가 수 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면서 ‘고구려가 옛날부터 중국 땅이었다’고 역사왜곡한 말이다. 또 사료 G-2에서 『사기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예로부터 말하기를 ‘조선 땅’이라 한다.”고 하였다.
 
『괄지지』는 당태종의 4남인 이태(李泰, 618~652)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이다. 이때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장수왕 평양성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였다.<『고조선으로 가는 길』제2부 4장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참조>.
그리고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은 갈석산(백석산) 부근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였다<『고조선으로 가는 길』제1부 5장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찾아서’ 참조>. 당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보다 1천여 리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괄지지』에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라고 운운한 것은 고구려 침략의 명분을 쌓기 위한 역사왜곡에 다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당태종은 서기 645년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요동은 중국 땅이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다. 그렇게 명분을 쌓은 후에 마침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사료 G-2에 인용된 『괄지지』의 기록은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1천여 리 동쪽으로 이동하여 난하 하류 일대로 오인하도록 만든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사료 H-1, H-2에서 보는바와 같이 서기 801년 편찬된 역사서인 『통전』의 갈석산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H-1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晉 『태강지지』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의 옛 지경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이 아니다.” 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云 :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通典』卷一百七十八, 州郡八, 古冀州 上

H-2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 북평군 남쪽 20여리에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 「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 『通典』卷一百八十六, 邊防二, 東夷下, 高句麗
『통전』은 북평군 노룡현의 갈석산을 ‘우갈석’으로,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을 ‘좌갈석’으로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통전』은 <그림 1>에서 본래 갈석산인 ‘갈석산 1’을 ‘우갈석’으로, 가짜 갈석산인 ‘갈석산 4’를 ‘좌갈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4.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 갈석산은 동일한 ‘우공갈석’으로 백석산(또는 낭아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통전』은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상서』의 문구를 엉뚱하게 ‘우갈석’으로 해석하면서 ‘좌갈석’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괄지지』의 기록대로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을 난하 하류의 고구려 평양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둘째,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에는 중국 요나라(916~1125) 때의 대대적인 지명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여 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의 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요나라 때에 갈석산의 지명 이동과 더불어 하북성 지역의 지명들이 요령성 지역으로 대대적인 지명 이동이 일어났다.
 
이때 본래의 갈석산이 있던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포로들을 난하 하류의 갈석산 지역으로 이주시킨 기록을 『요사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요나라는 난하 하류 일대에 평주 요흥군(『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속한 안희현과 망도현의 기록을 살펴보자.

I-1

“안희현은 본래 한나라 영지현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가 정주 안희현의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평주 동북쪽으로 60리에 있다. 가구수는 5,000이다.” 安喜縣. 本漢令支縣地, 乆廢. 太祖以定州安喜縣俘户置. 在平州東北六十里. 户五千.”  『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

I-2

“망도현은 본래 한나라 해양현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가 정주 망도현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해양산이 있다. 현은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가구수는 3,000이다.” 望都縣. 本漢海陽縣, 乆廢.太祖以定州望都縣俘户置.有海陽山.縣在州南三十里.户三千).”   『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


위의 기록에서 정주定州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로 본래의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보정시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평주 요흥군은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위치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의 갈석산 지역의 주민들을 난하 하류의 갈석산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지명도 함께 이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갈석산의 지명도 이때 함께 지명 이동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그림 6> 요나라 때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들 : 요나라 이전 요동의 각종 지명은 필자가 고증한 것이며, 요나라 이후의 요동의 각종 지명은 강단사학계의 통설이다.


요나라의 대대적인 지명이동과 송나라 주자학파의 ‘구하윤해설’로 인하여, 당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과 지명 이동된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을 두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 제작된 중국 고지도들을 보면 1177년 제작된 『기주협우갈석도』와 1209년 제작된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는 본래의 갈석산인 보정시 백석산을 갈석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반면 1136년 제작된 『우적도』와 1177년 제작된 『구주산천실증총도』는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표기하고 있어 갈석산에 대한 당시의 혼란상을 읽을 수 있다.
 
결국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의 대대적인 지명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등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생겨났다. 현대과학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로 이론적 존립근거를 마련한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그러나 이후 주자학파들이 득세하면서 정설로 굳어져 갔다.
그리고 본래의 갈석산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지금까지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무려 1천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진짜 갈석산 행세를 해오면서 한민족의 상고사를 짙은 안개 속으로 몰아넣었다. 중화 사대사관에 의하여 집요하게 진행된 고대판 동북공정의 결정판이었다.
 
(2) 한반도 평양의 ‘가짜 갈석산’

 
일제 강점기에 또 하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났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반도 평양 일대를 한나라 낙랑군으로 역사왜곡 하면서부터이다.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 한반도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일본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사학잡지』에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고를 통하여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며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나바 이와기치의 설을 이어 1928년 중국학자 왕국량은 『중국장성연혁고中國長城沿革攷』라는 책에서 평양 일대에 갈석산을 표기하고 진나라 만리장성을 황해도까지 연결시켰다.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 한반도 평양 지역을 한나라 낙랑군 지역으로 만들려 하다 보니 자연히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이곳까지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의 동단이 위치한 갈석산이 어떠한 산인가?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라는 뚜렷한 시‧공간적 좌표가 존재한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라는 위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산이다. 지금까지 여러 갈석산들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았듯이 하나같이 황하 하류 해변가와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도 그곳으로 황하 하류가 흘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하윤해설’을 만들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이런 갈석산의 본질마저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주장하려면 그곳에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렀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황하 하류가 한반도 평양으로 흘렀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식민사학자들은 중국의 정사 기록들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병도의 낙랑군 수성현 주석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J-1

“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산천조에 요동산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에 후대소축後代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의 동서행성의 석성(고산자의 『대동지지』에는 이를 패강장성의 유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 설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48쪽.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만리장성이 있어야 하며, 또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러야 한다. 이병도는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을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으로 비정하면서 그곳에서 갈석산과 만리장성을 찾을 수 없자, 중국 정사인 『진서』「지리지」의 기록을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설로 부정하고 만다.
 
하지만 필자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 지역에 위치하였다. 그곳에는 수성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갈석산도 있고, 만리장성의 동단도 있으며, 과거에 황하 하류도 그곳으로 흘렀다. 『진서』「지리지」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다.
 
 이병도는 엉뚱한 곳에서 한나라 낙랑군을 찾으면서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중국 정사의 기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이런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설은 그러나 강단사학을 장악한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하여 해방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확고부동한 통설로 행세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확고한 기반이 되고 있다(다음회 계속).

글쓴이 :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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