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 지지리도 불운했다. 무명화가에다가 정신병자라는 꼬리표마저 달려있으니, 어딜 가나 찬밥 신세였다. 1890년 7월 29일, 서둘러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마을사람들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1990년 7월 29일, <르몽드>지는 이 마을에서 다시 치러진 반 고흐의 장례식을 소개했다. 5백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미사와 행진을 곁들인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신문은 그 장례식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과거의 무관심’에 대한 ‘속죄’라고.


영화 <암살>의 열기가 대단하다. 현대인이 영화관을 찾는 이유야 다양할 테지만, 변영주 감독의 분류체계로는 두 가지로 나뉜단다. 하나는 스트레스를 ‘풀러’ 가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스트레스를 ‘먹으러’ 가는 유형이다. <암살>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그리고 후자의 영화들은 관객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암살>이 인기몰이에 성공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차지하는 좌표가 범상치 않다는 뜻이다.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암살>의 시대 배경은 1933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한 뒤 만주국을 성립한 직후다. 이 전쟁은 바야흐로 태평양전쟁의 서막이었으므로, 조선 식민지 백성에게는 일제의 무소불위한 힘을 절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안옥윤(전지현 역) 일행이 만주를 떠나 경성역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 “6시 시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안내방송에 따라 일장기 하강식이 이루어지는데, 구내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장기를 향해 묵념을 한다. 3ㆍ1운동 때까지만 해도 하늘을 찌르던 반일ㆍ항일 정신은 다 어디로 갔나. 완전히 백기를 든 모습에 안옥윤 일행은 아연실색한다.

‘안’의 눈에는 한없이 익숙한 행태가 ‘바깥’의 눈에는 도무지 생경하게만 보인다. 내가 속한 문화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행동이 남의 문화에서는 금기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인간을 구원하는 건 바깥인가 싶기도 하다. 귀 닫고 눈 가리고 안에만 갇혀 있으면 염석진(이정재 역)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을 테다.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그의 말은 바깥을 부정한 데서 나온 오판이었다. 일제의 조선 침략에 끝내 항의하고 저항하면서 독립전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그 바깥을.

<암살>은 우리 역사에서 슬그머니 밀쳐두었던 바깥의 경험을 안으로 소환한다. 해방과 전쟁, 분단으로 이어진 숨 가쁜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어떻게 만주가, 만주를 수놓았던 무수한 ‘그들’의 이야기들이 ‘암살’ 당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여 이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일종의 속죄의식인 것이다. 광복 70년이 되도록 그들에게 정당한 자리를 찾아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 죄악을 회개하는 일이다.

회개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한다. 의식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제국의 질서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바깥과 접속하고 나니 순 거짓말이다. 이 깨달음으로 과거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다.

그러니까 <암살>을 보며 그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수준의 감상에 머문다면, 그건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를 곧추세우려는 의식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역사와 유리된 영혼구원이란 종교적 허상일 뿐이라는 것, 광복 70년에 <암살>이 주는 또 하나의 깨우침이다.

 

구미정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