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한자신문이 과연 <한성순보>일까...

5백 년 전의 조간신문, ‘朝報’를 아시나요?

식민사관으로 오염된 우리 역사를 바로 잡겠다고 나선 <참환역사신문>...

 

인간이 집단공동체 생활을 한 이후 언론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존재했을 것이다. 소식을 전하고 그 소식을 가공하여 현상을 평가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언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언론 기능을 신문 방송이 주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문과 방송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정보를 쏟아 낸다는 것이다. 수많은 신문과 방송들이 각각의 자기만의 색깔이 없다. 보도 내용과 분야가 거의 똑 같다. 다만 자기 언론의 기득권을 위해서 관점을 집어넣어 내보내는 수준이다. 예를 들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보도를 보면 붕어빵이라고 할 정도로 부정적 일변도로 똑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많은 노동자에 대한 소식은 거의 무시되는 실정이다. 또한 보도를 해도 천편일률적으로 부정적이다. 정당한 파업조차도 사용자편에서 대부분 보도를 한다. 또한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노동자를 대변하는 신문이나 방송이 없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그 만큼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이 기형적으로 구조화 되어있다는 얘기다.

▲ 서기1883년에 발행된 한문체의 한성순보.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신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신문은 관보와 국내 사사로운 면을 다루는 사회면, 외신, 물가정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서기1515년 '조보朝報'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조보는 순 한문체였고, 서양식 기준의 신문보다 수백년 앞서 우리는 이미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독자 수나 접속수를 가지고 주류니 비주류니 하면서 스스로 권력집단화 한지 오래다. 조선일보를 가리켜 ‘밤의 대통령’이라고 하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론을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해당 언론기관의 권력은 정치권력을 능가할 정도로 비대화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사장이 있고 결국 그 개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생민들에게 선거를 통하여 대표권을 위임받은 적도 없는 일개인이, 선거를 통하여 생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생민주권의 민주주의 국가인지 의심케 할 정도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기형적, 일인 독재적 언론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지금 대한민국이 앓고 있는 망국적 혼란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다양성이 상실된 언론이 난동을 부리는 나라는 여론이 바르게 형성되지 못하고 언론기관이 스스로 권력자가 되어 자기 입맛에 맞게 여론을 왜곡한 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국가일 뿐이다. 조선일보의 사설社說을 보면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 참환역사신문창간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역사라는 단일 주제를 가지고 신문을 발행한다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한국의 언론시장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미 포화상태라 할 정도로 난립하고 있는 언론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언론사가 있다. 창간 한지 1년이 된 ‘참환역사신문’이다. 언론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독특한 언론기관이다. 일반 종합신문이 아니라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창간된 신문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주제로 삼아 바른 역사를 정립하겠다는 것이 이 신문의 창간목적이다. 이 신문은 지난 서기2016년 9월 23일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창간1주년기념식 및 학술발표회를 가졌다. 이지영 발행인은 역사만을 주제로 하는 신문을 창간하여 1년간을 발행해 오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토로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오기로 시작했고 다음에는 사명감으로 하였으며 이제는 보람으로 하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남아서 함께한 동지들에게 공을 돌렸다. 창간1주년을 축하하는 축사도 있었다. 축사 중에는 우리나라 언론역사를 알 수 있는 축사도 나왔다. 역사의병대 총사령인 김정권씨의 축사를 보면, 소중화 조선시대에 이미 우리는 오늘날의 현대적 신문 못지않은 신문을 가지고 있었다.

광해군 8년에 ‘조보朝報’라는 신문이 나오는 데, ‘가위지사可謂之事 물출조보勿出朝報’라는 내용이다. 김정권씨는 이를 ‘비밀스러운 사건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로 번역하여, ‘언론에 비춰서 불이익한 내용은 눈감아 달라는 것’으로 풀고 있다. 이어 서기1515년 5월 2일의 기록을 소개하였다. 권민수라는 신하가 “모든 국사가 여과 없이 보도되고 있는데 이것은 승정원에서 검속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불평한 것에 대하여 임금이 “조정이 결정한 일들을 승정원이 매일 아침에 반포하고 기별청에 보내는 조보는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니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은 승정원이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라는 기사를 소개하였다. 이 기사를 놓고 보면 지금의 언론행태보다 5백여 년 전의 왕조시대가 더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친일종미세력이 집권한 후 정권의 통제를 받는 공중파 방송이 정권의 나팔 수 노릇하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 이지영 발행인(왼쪽)이 박인숙 편집장(오른쪽)에게 공로패를 수여하고 있다. 이날 참환역사신문을 이끌어온 구성원들과 기고자들에 대한 표창이 이루어졌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참환역사신문을 지켜온 희생과 노력들이 역력하였다.

‘참환역사신문’ 1주년 기념식에 이어 학술발표가 이어졌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과, <임나일본부는 없었다>의 저자 황순종 역사연구가가 발표자로 나섰다. 이 소장은 강단주류식민사학을 겨냥하여, 고대사의 핵심문제가 되는 중국의 식민기관, 낙랑군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혔다. 낙랑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기준 점이 갈석산이다. 이 소장은 갈석산의 위치를 중국의 다양한 사서를 근거로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의 하북성 일대로 입체적으로 고증하였다. 이렇게 갈석산을 통하여 낙랑군의 위치를 밝힌 다음 낙랑군이 위치한 지역에 기자조선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기자의 무덤의 위치를 찾아냄으로써 낙랑군의 위치를 재확인해 주었다. 이어 강단주류식민사학계가 낙랑군 재평양설의 식민사관을 고수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이른바 ‘교군론’도 비판하였다. 식민사학계가 <자치통감>의 기사를 들어 ‘교군론’을 펼치는데, 그 기사에는 겨우 수천 명을 가지고 낙랑군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만약에 북한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교군론’에 따라 요동으로 이사 갔다면 수십만명이 되는 낙랑군인구 중에서 이사 간 인구를 아무리 늘려도 7천 명 정도인데 이것 가지고 어떻게 한 개의 군을 설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의 우리국사는 왜구난동기에 왜구가 비정해 놓은 지리를 가지고 구성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제식민사관에 따라서 국사가 쓰여졌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였다.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하북성일대에 존재했음을 다양한 중국사서를 근거로 증명하였다. 강단식민사학계가 낙랑군 재북한평양설의 근거로 주장하는 '교군설'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이어 황순종 역사연구가는 임나일본부는 존재하지 않았다며, 최근 문제가 된 전 고려대학교 교수, 김현구씨의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가 사실상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고대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식민통치하였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일제식민사관이다. 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는 <일본서기>에만 나오는데 그 핵심은 임나의 위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일본 열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현구씨는 일본 극우 식민사학자 쓰에마스야스카즈의 설에 따라, 임나를 우리나라 남부로 비정하고 논리를 전개한다고 하였다. 결국 겉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참환역사신문창간1주년 기념식에는 이도상 예비역준장,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장관, 허신행 전 농림수산부장관 등 많은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참환역사신문’은 지난1년간 발행한 종이신문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 통권1호로 배포하였다. 이 날 국제회의장은 창간1주년을 축하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가득찼다. 특히 여러 종파의 승려들도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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