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정치인에게서 김상헌과 같은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글:김정락(미학자, 서울대 서양화)

 

퇴계 학풍 계승한 근본주의 성리학자, 김상헌

왕이 아닌 조선에 충성한 것, 삶 곳곳에 보여

청 태종에게 보낼 왕 친서 찢어버리는 결기도

삼전도 치욕에 목매달아 자결 시도했으나 실패

청의 회유, 협박에도 의지 꿋꿋, 청 관료도 탄복

▲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한 장면.
▲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한 장면.

<淸陰 김상헌>

‘맑은 그늘’이란 뜻의 호를 썼던 김상헌은 선조 때 태어나 효종 때 사망한 조선의 (고위)관료였다. 퇴계의 학풍을 계승한 그는 근본주의 성리학자였다.

오늘날 그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핵심인물이고, 철저한 사대주의자였고, 조선후기 대표적인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의 시조라고 알려졌다. 이 모든 것이 그를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인격과 품성은 삼엄했고, 강골 그 자체였다. 물론 시각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릴 수도 있겠다. 여러 임금을 모셨지만, 그가 왕이 아니라 조선에 충성했던 인물이라는 점은 삶의 여러 곳에서 읽혀진다.

왕왕 그는 왕의 비위와 의지를 거슬렀다. 광해군 때에는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비판하는 정인홍을 탄핵했고, 청나라의 편을 들었던 강홍립의 복권을 반대했다.

또한 반정으로 왕위를 쟁탈했던 인조가 부친(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송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남한산성에서는 최명길에 맞서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보낼 왕의 친서를 찢어버리는 결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의 곧은 성품과 근본이 깊은 가치관은 거침이 없었고, 덕분에 출사와 사직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나약하고 비겁했던 임금과 권력과 이권에 혈안이 되었던 신료들 사이에서 그는 고집불통이었다.

병자호란에서 그는 무모한 전쟁광으로 비추어졌다. 왕을 비롯해 모든 권력자들이 안위를 챙길 때에 그는 일거수일투족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못지않게 강골이었던 그의 형 김상용은 강화도에서 폭사로 외침에 저항하였다. 엎드려 살기보다는 서서 죽을 것을 바라던 김상헌은, 인조가 송파들판(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청나라식의 예식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할 때, 산성 내 숙소에서 목을 맸다.

겨우 살아남은 그는 굴욕적인 국운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호란 이후 청나라에 줄을 댔던 간신배들과는 달리, 그는 삼학사와 함께 청으로 압송시켜달라는 간언을 올렸다.

호란 이후 명을 치기 위한 청의 출병을 거부한 죄로 심양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의지와 몸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위세에 청의 관료들도 감복했다고 한다. 살아 돌아온 그는 효종 때 북벌 정책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되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동 말 동 하여라“

위는 김상헌이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지은 시다. 이때 그의 나이 71살이었다. 역사는 정세에 어둡고 곡학아세의 전형적인 인물로 치부한다.

하지만 김훈이 소설 ‘남한산성’에서 그린 것처럼, 그의 정신은 서늘하고 삼엄했고, 말과 행동에 사리사욕의 티끌이 묻지 않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사족) 21세기 대한한국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김상헌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완전히 포기했다. 이 절망감을 안고 근처에 있는 남한산성이나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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