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강역은 만주에 이르렀다.

글: 지방분권포럼 대표 유종성

▲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만주를 경영한 고려,  여진인들 통제해

고려 태조 시 이미 압록강 넘어 진출

후에 거란과의 국경갈등 생겨

윤관이 개척한 정주는 길림성 안도현 송강진

거란의 2차 침입시 기록 소실돼

▴현행 한국사교과서와 개설서에 그려져 있는 고려 북방경계​
▴현행 한국사교과서와 개설서에 그려져 있는 고려 북방경계​

조선초 <고려사>를 편찬한 학자들은 고려 당대의 영토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고려의 강토를 평하고 있다.

"...서북쪽은 고구려 경계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 때보다 확장되었다“

<고려사> 지리지

​그러나 현행 한국사 교과서와 개설서에 그려진 압록강 하구에서 함경도 정평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은 위와 같은 사료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계승을 표방한 고려는 태봉의 궁예정권이 추진하던 북진정책을 계승하여 태조 즉위와 동시에 고구려의 고도(古都)였던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상실했던 북방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꾸준히 애를 쓴다.

​태조 즉위년(918년)에 골암성의 성주 윤선의 귀부에 힘입어 고려는 골암진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동북면 수복에 나서게 된다.

*주(州).진(鎭)은 일정한 영역을 지닌 행정구획이고, 그 권역 안에 행정과 군사적 거점인 진성(鎭城)과 산성(山城)이 포함된다.

​골암성의 위치를 보통 함경도의 안변 지역으로 비정하나 골암(korgan)성이 농경과 어로생활을 하던 여진인이 살던 "골간(骨看,kor[g]am)" 지역과 음이 비슷하고, 그곳이 흑수인들과 쉽게 접촉하는걸 보면 두만강 이북 어느 지점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발해가 존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사료에 의하면 고려는 직접적으로 발해에 부속된 여진 부족들과도 만나고 있다. 아마도 당시 발해는 왕조의 말기적 현상으로 지방통제가 이완되어 말갈의 여러 부족들이 반독자적으로 활동한 듯 싶다.

<요사> 야율우지전에는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 싸우지 않고 이겼다”고 밝히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능히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후기신라는 일찍이 헌강왕 시기에 이미 발해에 부속된 말갈세력과 접촉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동왕 12년(886년) 봄, 북진(北鎮)에서 보고하길 “적국인(狄國人 발해인)이 진에 들어와, 판자조각을 나무에 걸고 돌아갔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가져다 바쳤다. 그 나무 조각에는 글이 15자 쓰여 있었는데, “보로국(寳露國)과 흑수국(黒水國)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친해 소통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발해 휘하에 속한 말갈세력들이 단독으로 신라와 교섭을 시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 신라의 강역이 최소한 함경도 일대를 점유하지 못하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신라는 일찍이 진흥왕 때 영토를 크게 개척하여 이미 함경남도 일대까지 진출한 것이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통해서 확인된다. 통일 이후에는 좀 더 북진했을 것이다.

▲발해와 후기 신라 강역
▲발해와 후기 신라 강역

발해의 서경압록부와 남경남해부가 집안과 북청이라는 기존의 통설과는 다르게 <요사> 지리지는 두 곳이 요동반도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발해 멸망 후 일어난 발해부흥운동도 모두 요동반도 북부와 장광재령 이북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보아야 할 터이다.

​고려 태조대에 이미 여진에 대한 기미주 설치가 시작되고 있다. <고려사>에는 국초부터 여진인들을 "번인(蕃人)"으로 표기하는데 ,흑룡강 일대 흑수말갈인들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 '번인'은 정치적으로 복속되어 중앙정부의울타리 역할을 하는 세력을 지칭하는 바이다. 비록 기록의 인멸로 확인되진 않으나 일찍히 고려가 고구려 후신을 표방하면서 과거 고구려고토에 살던 모든 여진인을  '번인'으로 상정하여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후대의 복속관계를 소급하여 실록 편찬과정에서 국초의 여진인까지도 '번인'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진인들이 골암진을 침범하여 국가의 우환이 되자 태조가 유금필에게 개정군 3천을 주어 토벌하고 대성(大城)을 쌓아 북변이 평안해졌다는 기사가 있고, 이때 여진 추장 3백명과 1천5백인이 내복하고 고려가 여진인 포로 3천을 돌려보낸 것을 보면 전투규모와 정복지역이 매우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여진부락들을 번속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성과로 인하여 후에 후백제와의 일리천 전투때 흑수,달고,철륵인 9천5백인을 경기병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효백 著 ‘일본은 고려의 속국이였다’에서는 철륵을 흑룡강성 가목사시로 비정하고 있다.
▴강효백 著 ‘일본은 고려의 속국이였다’에서는 철륵을 흑룡강성 가목사시로 비정하고 있다.

926년 거란의 기습으로 발해가 망하자 거란은 상경성에 동란국을 설치하여 통치했으나 2년 후에 실패하고 근거지를 동평으로 옮기게 되면서 다수의 발해유민과 여진인들이 고려로 자신들의 지배지역을 고스란히 가지고 귀부하는 일들이 빈번히 나타나게 된다. 귀부와 내투는 약 200년동안 꾸준히 이어진다.

고려의 서북계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성종 원년에 최승로가 시무28조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마헐탄으로 경계를 삼은 것은 태조의 뜻이고, 압강가의 석성으로써 경계를 삼은 것은 대조(大朝=거란)의 정한 바입니다"라고 기록했다.

오늘날 '마헐탄'이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나 분명히 현)압록강 이북인 것만은 분명하다. <속자치통감장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주목된다.

​‘(원풍 5년)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등주에 와서 항상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이 고려와 왕래를 하는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여진의 사신은 끝내 오지 않았다’

​위에 기사를 통해 고려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있던 마행도(馬行道)를 점거한 것을 보여주는데, 이 길은 발해의 조공도로 쓰인 길이며 여진인들은 이 길을 통해 중국과 말무역을 했다. 마헐탄(馬歇灘)은 '말이 쉬어가는 여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분명 마행도 중간지점에 있던 하천일 것으로 생각된다.

▲ 발해의 조공도가 곧 마행도로 활용되었다.
▲ 발해의 조공도가 곧 마행도로 활용되었다.

태조 당시 고려가 요동의 마헐탄까지 진출하여 그곳을 자국령으로 선포하자 이에 거란이 반발하며 고려에게 현)압록강 이남까지만 인정하겠다고 통보했던 것이다. 그러자 두 나라 사이에는 국경을 두고 갈등이 생겼고, 고려는 제3대 정종 때 거란의 침입을 예상하고 광군 30만을 조직하여 침입에 대비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4대 광종 때에 이르러서는 보란 듯이 요동일대로 좀 더 북진하여 거란의 동경과 고려의 안북부 사이에 있던 수백리 땅에 "가주"와 "송성"을 설치하며 확실하게 강역화했던 것이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제6대 성종 때 거란의 침입이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서희는 거란 침입의 원인을 성종에게 고하면서 “거란이 실상 이 두 곳을 빼앗기 위해 침입한 것이라.”고 진언했다.

​만약 광종 때 수복하여 설치한 가주와 송성 일대가 기존의 통설처럼 청천강 이남이였다면 거란이 고려강역을 이미 압록강까지라고 인정해 주었는데 침략을 강행할 이유가 없다. 가주와 송성이 현)압록강 이북 즉 요동일대에 위치해 있었기에 거란이 반발하며 이 두 곳을 빼앗고자 고려를 침략했던 것이다.

고려사 성종 4년 기사에는 "이에 앞서 거란이 여진을 칠 때 우리나라 영토를 거쳐 갔으므로..."라는 기사가 보이고 있으며, 또 "거란은 요해 밖에 위치해 있고 우리와의 사이에 두 강이 막혀 있어 그와 상통할 길이 없을뿐더라,,"라는 기록이 보인다.

위에 기사를 통해서도 고려 강토가 요동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란이 여진을 칠 때 고려가 점거하고 있던 마행도를 지나갔을 것이고, 거란이 요해 밖에 위치해 있다는 기사는 요동일대가 거란의 강역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제17대 인종때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강역을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제25대 충렬왕때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요수는 일명 압록이었는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부른다(遼水一名鴨渌 今云安民江)’ 라고 밝히고 있다.

성종 10년에는 "압록강 밖에 있던 여진을 축출하여 백두산 밖에 살게 하였다"는 기사도 나오는데 고려가 국초부터 함경도와 압록강을 넘어 요동 일대까지 점유하고 있지 못했다면 여진을 백두산 너머로 축출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고려는 성종 10년에 이미 현)압록강 이북까지 진출해 있었고, 함경도를 넘어 오늘날 간도 지역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인하대 고조선연구소팀의 연구에 의하면 거란의 1차 침입때 서희가 확보한 “강동6주”가 현)압록강 이북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에서 밝혀낸 강동 6주 추정 위치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에서 밝혀낸 강동 6주 추정 위치

성종 이후로도 발해인과 여진의 내투와 귀부는 계속되어 고려의 군현과 귀순주로 편입되었고, 고려는 남만주 일대를 점유하게 된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 많은 중에 특히 아래의 기사가 주목된다.

​‘(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어원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 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5권, 현종 17년

​고려가 만주일대를 실질적으로 경영하지 못했다면 나올 수 없는 기사이다. 고려에 복속하여 귀화한 여진의 땅을 '화내(化內)'라고 하였는데 고려는 화내의 여러 지역에 주명(州名)을 설정하고, 고신장을 하사하였고, 부족 간의 투쟁이나 약탈을 금지하며, 관방이나 성을 구축하여 강력한 통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숙종, 예종대에 단행된 윤관의 북정(北征)은 완안부가 동번의 내분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자 기미주를 고려의 주.진으로 편제하여 직접 지배할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 숙종 2년 거란주가 보낸 서신에는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라고 밝히는데, 용천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이니 거란이 인식한 고려 동북계의 지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송의 사신 허항종이 금의 수도 상경회령부(하얼빈 아성일대)를 가면서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 기행문에는 함주(현 개원)를 지나 북쪽의 동북평원으로 가다가 동쪽의 대산(大山)을 보았는데 고려와 경계 지역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금나라 사람들은 '신라산'이라고 부른다는 내용을 남겼다.

▴허인욱의 '고려중기 동북계에 대한 고찰'  지명 정리 ​
▴허인욱의 '고려중기 동북계에 대한 고찰' 지명 정리 ​

<고려사> 윤관전에서는 이 대산의 형세를 상세히 보도하는데 ‘...지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무성하여 사람과 말의 통행이 지극히 곤란하였다. 그 사이에 단 하나의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것을 “병항(甁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단 한 구멍으로 출입하는 까닭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한다. 선학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늘날 장광재령의 산세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최북단으로 알려진 '정주(定州)'를 기존의 통설은 함경도의 정평으로 비정하나 <고려사>를 보면 '정주'가 두만강 이북에 위치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에서 출발하여 길주로 가던 도중 나복기촌에 도착했을때 함주사록 유원서로부터 급보를 받게 되는데, 여진의 오야속이 사람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과정에서, 정주에서 나복기촌을 지나 함주까지 하루길이요. 함주에서 아지고촌(하얼빈 인근 아성으로, 금대 상경회령부)까지 하루 정도가 걸린다고 하는 바, 정주는 함경도 정평일 수가 없고, 거리상 지금의 길림성 안도현 “송강진” 부근으로 비정된다는 것이다.

▴허인욱의 ‘고려 중기 동북계에 대한 고찰’에 나오는 중국 지명 참조도
▴허인욱의 ‘고려 중기 동북계에 대한 고찰’에 나오는 중국 지명 참조도

또한 ​<금사>에는 금의 군사가 연례적으로 고려의 경계에 가서 해동청(海東靑)을 잡았는데, 고려 군사가 공격해서 금나라 사람들을 죽였다고 보고를 올리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동청인데, <금사> 등의 사료에 의하면 해동청의 주산지는 오국부(五國府)라 기록되어 있다. 오국부는 여진의 동북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의란(依蘭)지역이다.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문종 27년 동로병마사가 주청한 기록을 보면 문종대 귀순주의 확대 결과로 여파한령에 멀리 사는 여진인들까지 귀순해 옴으로서 고려의 북쪽 국경이 "양지무제(壤地無際)" 즉 영토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확장되었다고 한다.

​고려의 직간접적인 만주경영은 문종 시기에 극성기를 이루어 실질적으로 해동천자가 통치하는 해동천하의 권역이 형성된다.

​고려의 영토 수복은 오랫동안 꾸준히 추진되어 기미주를 바탕으로 하여 온건적이고 점진적으로 추진되어 서북쪽으로는 요동반도 중간지점에서 동북쪽으로는 두만강유역은 물론 수분하.송화강.흑룡강까지 미치는 광대한 지역으로 뻗어갔으니, 사서에 고려의 영토가 남북 만여리에 이르렀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강효백 著,
▴강효백 著, <일본은 고려의 속국이었다>

<삼국사기>에 '이렇듯 신라의 영토가 매우 넓다'는 표현이나 <고려사>에 '강토의 융성함이 고려 때에 극치(極矣)를 이루었다'고 표현한 대목에서 당시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의 실제 강역이 기존 통설과는 크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고려초 7대 실록이 거란의 2차침입때 소실되고 다시 편찬되는 과정에서 북방영토와 관련된 기사가 많이 인멸되었을 것이다. 조선초에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도 북방영토 기사가 어느정도 누락되었을 것이니, 이것을 감안하더라도 현전하는 기록만으로도 기존 통설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실증에 기반한 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속히 바꾸어야 한다.

▲이 지도는 KBS 다큐 한국사探에서 고증한 것이고, 우측은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주장하는 고려사 및 당시 공식 중국 측 공식 사서 요사, 금사를 반영한 고려 국경.
▲이 지도는 KBS 다큐 한국사探에서 고증한 것이다. 
▲이 지도는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주장하는 고려사 및 당시 공식 중국 측 공식 사서 요사, 금사를 반영한 고려 국경.
▲이 지도는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주장하는 고려사 및 당시 공식 중국 측 공식 사서 요사, 금사를 반영한 고려 국경.

*위에 글은 김구진, 방동인, 허인욱, 최규성, 김창현, 강효백과 같은 선학들의 논문과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의 연구 결과물을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