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은 지금도 유효하며 공동체 생존의 핵이다.

글: 민인홍(대종교 전리)

 

독립투사 신규식의 호, 예관에 대일 항전 의지 담겨

을사늑약 후 자결 시도하였으나 한쪽 눈만 실명 실패

상해임시정부 승인 이끌었으나, 내분으로 지리멸렬

종교초월 단군으로 뭉쳐 대동단결 독립선언서 도출

▲ 예관, 신규식 선생.
▲ 예관, 신규식 선생.

 

"우리의 마음은 대한의 혼이다. 망국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그래서 마음이 죽어버린 것 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

3.1 독립투쟁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초를 민족적·국제적으로 통합한 예관 신규식(대종교 첫번째 시교사) 도형이 그의 저서 '한국혼'에 남긴 처연한 외침이다.

그는 을사늑약을 보고 순국도 적극적 투쟁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바로 독약을 마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 쪽 눈만 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스스로 한 눈으로 일제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睨觀)'을 그의 호(號)로 삼았다.

그는 1921년 광둥(廣東)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유일하게 상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참담한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으로 처연하게 목숨을 끊고 말았다.

1921년 4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탐욕, 파벌, 신분, 지방, 노선, 금전 문제 등으로 도둑소굴같이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단재 신채호등 많은 뜻있는 투사와 지사들이 떠났다. 그러자 신규식은 '불식(不食)-불언(不言)-불약(不藥)'으로 임시정부의 단합을 외치며 이승을 하직했던 것이다.

예관 신규식은 1911년 대종교의 시교사(施敎師) 자격을 띠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하기에 신규식의 활동에는 대종교의 자금과 인력등이 지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규식은 1913년 대종교계 항일단체인 동제사(1912)를 조직하고, 그 영향 속에 조직된 신한혁명단·신한청년당 등이 상해 지역의 중추적인 독립투쟁을 담당하게 된다.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 가운데 신규식 · 박은식 · 신채호 · 조소앙 · 박찬익 · 조성환 · 이광 · 안정근 등이 '동제사' 인물들이며, '신한혁명당'에는 유동열 · 이동휘 · 박은식 등이, '신한청년당(1918)'에는 신규식 · 신채호 · 조소앙 등이 그 중심 역할을 하였다.

'2·8독립선언'의 배후를 말함에서도 상해의 '신한청년당(1918년)'을 빼놓을 수 없다.

'신한청년당'은 '동제사' (1912년)와 '신한혁명당'(1915년)의 정신을 이어받은 청년집단이었다.

다만 '동제사'와 '신한혁명당'이 '대종교' 인물들이 중심이었다면 '신한청년당'은 '기독교' 인물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러나 그 정신적 연결고리는 '단군'이었다.

다음 '신한청년당취지서'의 서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청년아! #단군의 혈손인 청년아! 과거의 치욕은 잠깐 잊을지어다. 선조시절의 영광을 회복할지어다. 인류의 앞날의 역사를 빛낼 새로운 대 영광을 창조할지어다

..……(중략)…...

우리는 정신적으로 민족을 개조하는 동시에 학술과 산업으로 우리 민족의 실력을 충실케 해야 하나니라. 이로써 우리 민족 자체의 자유와 문화와 행복을 득하려니와 이것으로 만족치 못할 것이니 마침내 #단군의 혈에서 출한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위대한 행복을 부여하기에 이르기 기할지니라

.…(후략)···”

동제사로부터 신한청년당까지 그 중심에는 늘 신규식이 있었다.

신규식은 동제사 → 신한혁명당 → 신한청년당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흐름을 지속시킨 인물이다. 일찍이 신한혁명당을 주축으로'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1917년)을 이끌어 낸 그는 국내와 일본 등에 젊은 동지들을 밀파해 '2·8독립선언'에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국내와의 긴밀한 연락 속에서'3·1독립선언'의 도화선을 당겼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천도교인 위창(葦滄) 오세창이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일깨운 것도 그러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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