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폭력과 위선의 기독교에 희생된 전태일은 또 하나의 수운 최제우였다.

 

송필경(시사평론가, 의사)

 

자본과 기독교에 죽은 전태일의 ‘너와 나’의 사상

빅토르 위고의 ‘너와 나의 삶이 하나’ 사상과 같아

수운 최제우의 차별이 없는 시천주 사상과는 하나

▲ 동학 창건자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과 자본폭력과 위선의 기독교인에 노동해방을 외친 전태일은 만민평등사상에서 하나다(편집인 주)
▲ 동학 창건자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과 자본폭력과 위선의 기독교인에 노동해방을 외친 전태일은 만민평등사상에서 하나다(편집인 주)

‘너는 나의 나다.’

전태일의 심오한 자각

전태일은 아름답고 비장하면서도 심오한 글로 쓴 유서 3편을 남겼다.

1969년 11월에 쓴 첫 번째 유서의 마지막 글이다.

“아, 너는 나의 나다. 친구여 만족하네.”

1970년 4월에 쓴 두 번째 유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 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나여.

…”

1970년 8월 9일에 마지막 유서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세 편의 유서를 관통하는 핵심은 ‘나와 너’ 관계이다.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그리고 나의 의식 속에서는 너는 나에게 ‘남(타자)’이다.

그런데 전태일 유서에서는 ‘너는 나, 나는 너’였다.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빅토르 위고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내 삶이 당신의 삶이고, 당신의 삶이 나의 삶.

내가 사는 것을 당신이 사니, 운명은 하나다!”

한없이 따뜻한 연민으로 <비천한 사람들(레미제라블)>이란 위대한 혁명 소설을 쓴 대문호의 글에서 너와 나의 운명이 하나임을 발견했다.

전태일의 ‘나와 너’의 의미가 좀 더 또렷이 다가왔다.

나는 왕조 체제 세습적 계급윤리의 타파를 설파한 수운 최제우와 자본주의 노동 착취에 저항한 전태일을 우리나라 근대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는다.

대동(大同=평등) 세상을 꿈꾼 두 분은 윤리적이며 실천적인 혁명가로 불러야 마땅하다.

▲ 백낙청, 김용옥, 박맹수 등 진보 지성인들이 공저한 동학의 개벽사상을 알리는 책이 출간되었다(편집인 주 )
▲ 백낙청, 김용옥, 박맹수 등 진보 지성인들이 공저한 동학의 개벽사상을 알리는 책이 출간되었다(편집인 주 )

요즘 수운을 알기 위해 정지창 선생님이 저자의 한 분으로서 소개한 <개벽사상과 종교공부>를 읽고 있다. 내 눈길을 끈 글이 있다. ‘왜 너는 나의 나’일까란 의식이 명료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수운의 깨달음은 ‘시천주(侍天主)였다.

이는 ‘내 안에 하늘님이 모셔져 있다.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진리다.

곧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거룩한 하늘을 모시고 있다.

진정 하늘을 위한다는 자세는 공중에 계신 하늘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늘, 동시에 나에게만 있지 않고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늘을 발견해 만인을 공경하는 일이다.

그러니 양반과 상놈, 남녀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전태일은 재주가 뛰어나 쉽게 재단사가 될 수 있었다. 시다 월급이 1,500원일 때 재단사는 20,000원 이상 받았다.

그러나 시다인 <너=‘어린’, ‘여성’, ‘노동자’>가 비참하게 당하는 노동 착취를 외면할 수 없어 돈을 버리고, 계층상승을 버리고 노동 투쟁에 뛰어들었다.

나와 너 모두의 마음속에 하늘이 있다. 그러니 나와 너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전태일에게 너의 삶은 곧 내 삶이니 너와 나는 한 운명이다. 너야말로 내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버리고 떠날 수 없다.

위대한 통찰력이 보여주는 세계는 시공을 초월한다.

전태일은 시공을 초월하여 수운과 한 몸으로 이어졌다.

두 분의 존재는 우리 역사에서 큰 축복이었다.

두 분의 정신을 제대로 엮으면 ‘평등 세상’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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