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에는 조선과 일제 치하를 관통하는 슬픈 역사가 있다.

 

글: 지승룡(목사, 전 민들레영토 대표)

 

광희문에 흐르는 개천, 무녀들의 세월이 녹은 무당천

일제 침략자, 신당동 공동묘지 없애고 길음동으로 바꿔

시신 수습하여 49제를 도맡은 것은 승려가 아닌 무당

천주교를 믿는다는 핑계로 남인의 씨를 말린 노론 세력

1907 군대해산시 126명 조선군 시신도 광희문 앞에 방치

무당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인식은 일제가 심어 준 것

▲ 조선 말기의 광희문. 자료: 위키백과 발췌(편집인 주)
▲ 조선 말기의 광희문. 자료: 위키백과 발췌(편집인 주)

1. 일본은 죽은 자의 땅도 빼앗았다.

남산과 약수동에서 개울이 만나 광희문으로 흐르는 개천 이름이 무당천이다. 초등학교 때 놀던 곳이다.

어릴 때 무당천이란 이름이 궁금했다. 무당벌레가 있어서 그런가 했다.

조선 숙종 24년 한양에서만 전염병으로 3,900명이 객사(강시) 되었다. 이런 돌발사가 자주 있었다. 그때마다 언덕 하나가 무덤이 되었다. 한양사람들 공동묘지는 신당동을 포함한 아리랑고개(청구동 금호동 옥수동 약수동)였다. 아리랑이란 말은 아리아리(멀고 멀어서 돌아올 수 없는 북망산천길, 황천길을 말하는 것이다.

일제 후반 신당동 공동묘지를 폐지하고 공동묘지를 지금의 길음동으로 바꾼다. 길음동 가기 전 고개가 미아리고개, 아리랑고개로 이름이 정해진 이유다.

무연고 묘이고 도심과 가까운 이 이 아리랑고개를 땅 정복자들이 당연히 그냥 두지 않았다. 광희문에서 <무쇠막고개> 라고도 (현 금호동)이곳에 백여 개의 대장간들이 한양에 필요한 여러 철물을 만들었고 그 뒤에서 토막촌이라 해서 도시빈민 3천 명이 어려운 일을 하면 버틴 곳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수습하고 또 49제까지 그들의 제사를 지내주는 신당은 절대 필요했고 그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조선의 무녀들이었다.

광희문 성저십리에 무녀들과 관련된 이름이 많은 이유다. 언덕이 잔잔한 이 지역이 서울 사람들 공동묘지에 적합했고 또 인구변화에 대한 관리로 광희문으로 장례 행렬을 통제했기에 사람들은 무당천이 흘러 청계천으로 가는 이곳 수구문을 시구문으로 불렀다.

장충초등학교 옆이라 그 시절 이 길을 갈 때는 어떤 엄습함이 있었다. 수백 년 이어온 선조들의 묘를 없애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대접은커녕 한없이 천대받은 토막촌 사람들을 강제로 밀어버리고 문화주택이란 신도시 개발이 이완용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중 도성도. 오른쪽 하단에 하얀 상자로 광희문을 표시하고 있다. 광희문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편집인 주). 자료: 위키백과 발췌.
▲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중 도성도. 오른쪽 하단에 하얀 상자로 광희문을 표시하고 있다. 광희문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다(편집인 주). 자료: 위키백과 발췌.

2. 개혁 세력을 몰살시킨다

조선 중후반 개혁 세력인 남인들은 열린 사고를 지닌 청년들이 많아 당시 서구문화에 관심이 있어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보수적 서인들은 이런 것들이 훗날 자신들의 세력이 약화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천주교를 박해한다.

겉으로는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을 문제 삼은 것 같지만 실제는 개혁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양의 청년들인 남인들의 씨를 말린 것이다. 광희문밖에 버려진 천주교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20석 규모의 작은 성당이 광희문 바로 앞에 있는 <현양관>이다.

충무로 쪽에 살다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간 정약용은 감옥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감옥은 살아있는 지옥이라고 하였다.

1907년에는 조선군대를 일본이 해산시키자 12,000명 군인이 의거를 일으켜 120명이 사망하는데 친일 정권은 이들을 광희문 앞에 그냥 버리고 가족들이 찾아가게 하였다. 광희문은 이렇게 恨의 문이다.

3. 무녀들에 대한 매도는 친일 잔재다

죽은 자에 대한 예와 살아남은 자들을 위로하고 인생의 메시지를 던져주며 삶을 위로하고 또 치유의 기능을 감당했던 무녀들은 일본인들에게 혹세무민 집단으로 매도되고 자신들의 직업과 일터를 문화주택이란 세 차례(1921년 1934년 1938년) 개발로 빼앗기게 된다.

서정범 교수는 무녀들은 일반인보다 가슴에 몇 배로 큰 태양 빛이 있어서 이런 험악한 인생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의 증조할머니는 황해도에서 가장 활동적인 무녀였고 강신무였다.

神이 들렸다는 것은 ‘보이는 示’와 ‘강하게 전달되는 申’의 합성어다. 강신무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말을 하였다. 진정한 강신무들은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이 두렵게 하였다. 또 자신을 연마시켜 일반무녀들이 하지 못하는 신통한 기술이 있었는데 증조할머니는 작두타기와 화살이 전문이셨고 제자들 수십 명을 가르치며 황해도 곳곳을 다니며 치유와 회복의 사역을 하였다.

특히 여성을 위한 전문병원과 서민들을 위한 전문병원이 이곳 일대에 생길 때 그곳에서 일했던 여성들이 무녀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녀에 대한 상식은 무녀에 대한 또 다른 박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의 예언적 능력과 의료상의 능력을 너무 깎아내린 것이다. 이것은 연예인들이 대중을 위해 위로하고 즐겁게 하고 치유하면서 출중한 재능을 갖고 있는데 딴따라라고 깎아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위의식이거나 권력자들의 조작에 덩달아 입방아를 떠는 것이다.

▲ 광희문 밖에 신당동에 있던 공동묘지(편집인 주). 자료: 위키백과 발췌.
▲ 광희문 밖에 신당동에 있던 공동묘지(편집인 주). 자료: 위키백과 발췌.

4. 광희문 비밀은 여성들이 풀었다

6·25 이후 광희문은 더 파괴되었고 이 무당천 주변에 시구문 시장이 생겼다. 여러 아주머니가 와서 떡과 채소 등을 팔며 장사했는데 그중에 한 분이 30대 중반 마복림이었다. 이분이 중국 양념이 들어간 떡볶이를 창안했고 70년 초에는 볶음판에 떡, 채소, 라면 등을 다 넣어 연탄불에 볶은 고추장소스로 먹는 즉석떡볶이가 청소년들 사이에 유명해졌다.

70년대 나도 교회 친구들과 와서 먹었는데 나는 연타 가스 냄새가 힘들어 금방 일어났던 기억이 있다. 80년대는 50개가 넘는 점포가 있었고 16살부터 이곳에 아버지가 하는 떡볶이집에서 DJ를 하던 박찬영씨가 마복림 여사와 함께 유명했는데 DJ DOC이 부른 ‘허리케인 박’이 그에 대한 노래이다.

왕십리가 시장으로 돈이 많이 도니 이곳에 동화극장 등이 들어왔고 지금의 홍대처럼 청소년들이 모이는 아지트였었다. 전쟁 가운데도 한국 여성들은 이렇게 마복림 여사처럼 일했다.

이것이 광희문을 여는 비밀번호다. 그 시절 나의 할머니는 40대 초에 어머니는 20대 초에 왕십리 중앙시장에서 쌀과 밀가루를 파시며 집안을 세우셨다.

두 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가 어린 시절 워낙 조용하고 부채만 주어도 하주 종일 부채 보면서 그냥 있어서 우리가 밖에 나가서 일하기 좋았어’ 아마 나의 인문학 명상은 어쩌면 이미 그 시절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나는 과격하고 병적인 종속적 자본주의 문화로 역사와 문화가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것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거나 적응하지 못한 많은 아픈 문화들을 어린 시절 보았다.

자연스럽지 못한 과음, 이웃과 잦은 충동, 정신 파괴, 비인간화는 조선인의 본질이 결코 아니다. 조선인의 기본적인 성품을 망가뜨린 일제와 독재의 병리 현상이었다.

오늘 기형도의 詩 외침이 그립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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