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학을 하는 식민사학자들을 더는 국고로 먹여 살려서는 안 된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전방후원분을 야마토 정권의 상징이라고 하는 김현구

야츠이, 전남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정권의 진출 증거

일본 대규모 무덤은 도쿠카와, 메이지 시대 새로 구축

전방후원분은 열도 개척민이 가지고 가서 정착시킨 것

▲ 고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대규모 전방후원분은 도쿠카와 막부와 메이지 정권시기 대규모로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편집인 주)
▲ 고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대규모 전방후원분은 도쿠카와 막부와 메이지 정권시기 대규모로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편집인 주)

 

<전라도천년사>,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16)

"일본열도에는 대체로 3세기 중엽 이후 생성되어 5세기에 전성기를 이루다가 6세기에 쇠퇴하는 전방후원형 고분이라는, 권력자의 무덤이 존재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야마또정권의 명운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마또정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전방후원형 고분의 존재 범위가 야마또정권의 세력이 미치는 범위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김현구,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180쪽)

조희승에 의하면, 야츠이(谷井濟一)라는 일본 고고학자는 1918-1919년에 걸쳐 혼자서 창녕 무덤떼에서 고분 100기 이상을 파헤쳤으나, 임나일본부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을 한 점도 발견하지 못하여 발굴보고서를 내놓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마토왜가 임나일본부를 통해 200년 동안이나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데, 그것을 증명할 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야츠이는 나주 반남면의 전방후원분 1기를 발굴하고서는, 보고서에 왜인의 무덤이라고 단정한 후 야마토정권 진출의 '증거'라고 주장했다는군요.

그런데 1990년 3월 26일자 아사히신문은 전방후원분의 원류묘 약 10기가 북한에서 연이어 발견되었으며, 축조시기는 일본보다 200-300년 앞서 있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조희승은 조선 무덤의 외형은 원형이나 방형인데 이 무덤 앞에 네모난 제단이 붙은 것이 전방후원 또는 전방후방무덤이라고 주장합니다.(조희승 <임나일본부 해부>, <초기조일관계사> 1-3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방후원무덤이 일본에 많고, 무덤 규모 역시 매우 큰 것이 많습니다.

조희승은 일본으로 간 조선 이주민 집단의 우두머리들이 자기 권력의 정치적 과시를 위해 제단을 매우 크게 만들어 원주민들에게 위압감을 주려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 김현구가 작성한  전남 지역의 전방후원분 분포.
▲ 김현구가 작성한 전남 지역의 전방후원분 분포.

그러나 최재석은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수릉'(修陵, 무덤을 복원함)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공사를 단행한 것인데, 수릉의 대부분이 도쿠가와 시대에 시작되어 메이지 시대에 행해져 수릉의 목적이 존왕의 실천과 황국사관의 구축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수릉의 수는 100여 개에 이르지만, 76개나 되는 왜왕의 묘는 당시의 자료에 따르면 완전히 새로 묘를 만든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일본 정부가 '천황릉'이라고 지정한 묘 중 학문적 증거를 바탕으로 지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군요.

여기에서 왜 전방후원분 이야기가 중요하냐면, 이 전방후원분이 어디에서 먼저 출현하여 어디로 이동해 갔는지를 살피면 일본 고대사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조희승에 의하면 일본 고분문화 시기는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부터 7세기 경까지인데, 3세기 말경부터 서부 일본에 갑자기 나타나는 무덤들은 전적으로 조선 이주민 집단의 진출지나 정착지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기원을 전후하여 높은 무덤 형식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이런 무덤 풍습을 가진 조선인들이 3세기 중엽 말경에 일본열도에 집단적으로 진출하면서 일본에 고분문화 시기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주로 가야와 신라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진출하였고, 따라서 발생기 고분에는 가야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의 초기 발생기 고분은 기내 야마토에서는 단 한 기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북한 학자 조희승은 임나는 일본 열도에 있었다고 고증하였다(편집인 주).
▲ 북한 학자 조희승은 임나는 일본 열도에 있었다고 고증하였다(편집인 주).

 

발생기 고분의 집결지는 조선과 가까운 북규슈 후쿠오카현 일대고, 다음으로 기비 오카야마현과 그 인접지역인 세토내해 연안지대이며, 마지막으로 동해안쪽에 가까운 교토 야마시로 지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방후원분은 조선에서 가까운 북규슈에서 맨 먼저 나타나고,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야마토왜의 근거지에서는 가장 늦은 시기에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이는 일본열도에 정착한 가야-백제계 세력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고분문화 시기에 형성된 15만 개 정도의 무덤들 중 서부 일본에 큰 규모의 무덤떼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조선이주민 집단이 동부 일본보다 서부 일본에 집중적으로 정착했기 때문이지요.

일본학자들 역시 고분문화 시기의 문화 양상이 조선적 양상을 띠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나, 유독 전방후원무덤이 조선에 얼마 없는 것을 들어 일본 고유의 것이라 떠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방후원분이 있는 곳은 대부분 주변에 조선식 지명이 많고, 조선인들의 집단 주거지가 있었으며, 반드시 조선식 산성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게다가 조선인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전방후원분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대부분 조선식 유물들이고요.

따라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야마또정권의 상징'이고, '전방후원형 고분이 야마또정권의 세력 범위'를 나타낸다는 김현구의 주장은 헛소리일 수밖에 없겠지요.

▲ 전 고려대학교 교수 김현구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라는 책에서 충실하게 일제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전파하였다. 일제식민사학자, 쓰에마스 야스카즈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비정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인 일본서기 지명을 그대로 따랐다(편집인 주).
▲ 전 고려대학교 교수 김현구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라는 책에서 충실하게 일제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전파하였다. 일제식민사학자, 쓰에마스 야스카즈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비정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인 일본서기 지명을 그대로 따랐다(편집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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