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포기한 적이 없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안과 의사)

 

노량해전, 퇴각하는 왜군 1만 이상 척살

소서행장, 사위 덕에 무사히 일본으로 도주

풍신수길 문장, 자민당 극우 세력과 동일

▲  메이지유신(1868년)을 일으킨 4개의 번(藩: 조슈ㆍ사쓰마ㆍ토사ㆍ히젠). ⓒ 『오사카의 여인』
▲ 메이지유신(1868년)을 일으킨 4개의 번(藩: 조슈ㆍ사쓰마ㆍ토사ㆍ히젠). ⓒ 『오사카의 여인』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고

현재 일본 정권은 대한민국의 우방국가가 될 수 없다.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봤다. 배우 백윤식이 맡은 역할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인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의 왜장(倭將)이라고 하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동원된 군대수를 보면 조슈(현재 야마구치 현)의 번주(藩主, 다이묘: 영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30,000명으로 제일 많으며, 사쓰마(현재 가고시마 현)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도 32명의 장수 중 서너번 째로 많은 10,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였다.

▲ 조슈(長州, 현재 야마구치 현)와 사쓰마(薩摩, 현재 가고시마 현)의 위치 ⓒ 『오사카의 여인』
▲ 조슈(長州, 현재 야마구치 현)와 사쓰마(薩摩, 현재 가고시마 현)의 위치 ⓒ 『오사카의 여인』
▲ 임진왜란에 참여한 왜장들. 임진왜란에서 동원된 군대수를 보면 조슈(현 야마구치현)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30,000명으로 제일 많으며, 사쓰마(현 가고시마 현)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도 서너번 째로 많은 10,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였다. ⓒ 『오사카의 여인』
▲ 임진왜란에 참여한 왜장들. 임진왜란에서 동원된 군대수를 보면 조슈(현 야마구치현)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30,000명으로 제일 많으며, 사쓰마(현 가고시마 현)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도 서너번 째로 많은 10,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였다. ⓒ 『오사카의 여인』
▲ 임진왜란의 왜군진격로.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문록의 역(文祿의 役)'이라고 한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왜군 중 가장 많은 3만명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진격로는 한양ㆍ안변ㆍ강릉ㆍ삼척 등으로 이어졌다. ⓒ 『오사카의 여인』
▲ 임진왜란의 왜군진격로.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문록의 역(文祿의 役)'이라고 한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왜군 중 가장 많은 3만명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진격로는 한양ㆍ안변ㆍ강릉ㆍ삼척 등으로 이어졌다. ⓒ 『오사카의 여인』
▲ 정유재란의 왜군진격로. 정유재란을 일본은 '경장의 역(慶長의 役)'이라고 한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우키타(宇喜多秀家)와 함께 사천ㆍ남원ㆍ공주ㆍ해남 다시 사천으로 진격하여 전라도를 휩쓸었다. 지도에서 전라도 방면의 노란선이 시마즈의 진격로이다. ⓒ 『오사카의 여인』
▲ 정유재란의 왜군진격로. 정유재란을 일본은 '경장의 역(慶長의 役)'이라고 한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우키타(宇喜多秀家)와 함께 사천ㆍ남원ㆍ공주ㆍ해남 다시 사천으로 진격하여 전라도를 휩쓸었다. 지도에서 전라도 방면의 노란선이 시마즈의 진격로이다. ⓒ 『오사카의 여인』

- 순천왜성(順天倭城):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은 1597년 7월부터 전라도를 휩쓸고 북상했으나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조 · 명(朝明)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전주에서 주춤한다.

왜군은 8월 말 전주에 모여 회의를 한 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만 계속 북상하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회군한다.

전남 순천으로 남하한 고니시 유키나가군(軍) 1만 4000여 명은 1597년 가을부터 순천에 주둔했다. 조 · 명 연합군은 9월 20일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순천왜성을 점령하기 위한 수륙 합동작전을 펼쳤다.

▲ 정유재란 당시 순천 왜성 전투와 노량해전 등의 장면을 그린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에서 순천왜성 전투 장면만 따로 그린 '정왜기공도'.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 정유재란 당시 순천 왜성 전투와 노량해전 등의 장면을 그린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에서 순천왜성 전투 장면만 따로 그린 '정왜기공도'.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후 1598년 음력 11월 18일 순천왜성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은 부산으로 철수하려 했지만, 순천왜성 앞바다에 버틴 조ㆍ명(朝明) 연합 수군에 가로막혀 순천왜성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고립된 신세였다.

결국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남해왜성에 주둔해 있던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宗義智),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성왜성의 다치바나 무네토라(立花統虎), 부산에 주둔해 있던 테라자와 마사시게(寺澤正成)와 다치바나 나오쓰구(立花直) 등이 일제히 수군을 이끌고 순천왜성으로 향했다.

고니시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천왜성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 수군은 왜군의 긴박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왜군 구원부대부터 격파하기 위해 이날 밤 비밀리에 하동과 남해 사이 좁은 바닷길인 노량해협으로 이동했다.

11월 19일 새벽 조ㆍ명 연합 수군 전함 500여 척과 왜군 전함 500여 척이 좁은 노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렸다. 이날 새벽 2시께 시작된 전투는 정오까지 계속됐다.

▲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순천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을 구하기 위해 출격하였고,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 부장 등자룡을 전사시킨 인물이다. ⓒ 『오사카의 여인』
▲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순천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을 구하기 위해 출격하였고,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 부장 등자룡을 전사시킨 인물이다. ⓒ 『오사카의 여인』

이순신 함대와 시마즈 함대가 싸우는 사이, 고니시 군(軍)은 퇴각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시마즈의 배와 병력은 거의 궤멸하였는데 250척 중 200척이 파손되고 겨우 50여척을 이끌고 도주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전사자는 1만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 에도막부(무신정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후 일본 전역의 번주(藩主, 다이묘: 영주)들은 동서(東西) 둘로 나뉘어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싸움을 일으켰는데, 이때 히데요시 아들 편인 서군(西軍)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인 동군(東軍)의 싸움이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이며 일본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때 조슈(야마구치 현)의 번주(藩主, 다이묘: 영주)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사쓰마(가고시마 현)의 번주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히데요시의 아들 편인 서군(西軍)으로 참전했다가 동군(東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하였고 이때부터 250년 간의 에도막부(江戶幕府: 무신정권)시대가 도래한다.

- 200개가 넘는 독립 소국인 번(藩)

에도막부(무신정권) 시절 일본은 전국이 200여 개의 번(藩)으로 나누어지고 일정규모 이상의 번은 독자적인 조세ㆍ행정ㆍ사법ㆍ입법체계와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경제도 독자적으로 운영되어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 에도막부(무신정권) 시절 막부(幕府)의 직할지인 교토와 에도(도쿄)를 제외한 전국에 200여 개의 번(藩)이 있었는데 이들은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전근대적인 봉건국가체제였다. ⓒ 『오사카의 여인』
▲ 에도막부(무신정권) 시절 막부(幕府)의 직할지인 교토와 에도(도쿄)를 제외한 전국에 200여 개의 번(藩)이 있었는데 이들은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전근대적인 봉건국가체제였다. ⓒ 『오사카의 여인』

일본은, 700년 이상을 전근대적 봉건제도인 막번(幕藩)체제라는 정치체제에 머물러 있었으며,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에나 중앙집권 국가로 되었다. 이것은 일찍이 중앙집권국가를 이룬 중국이나 한국에 대비된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주도세력이었던 조슈(야마구치 현)의 모리 데루모토와 사쓰마(가고시마 현)의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들이 250년 만에 에도막부(무신정권)를 뒤엎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메이지유신(1868년)이고 그 세력들의 후예가 바로 현재의 일본지배층이다.

- 메이지유신, 2개의 번(藩)

메이지유신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메이지유신(1868년)은 일본의 지배권을 노린 4개의 번(藩: 조슈ㆍ사쓰마ㆍ토사ㆍ히젠)이 주동이 되어, 250년간 일본을 지배해 온 에도막부를 타도한 내전과 쿠데타이다.

내전은 이들 4개 번(藩)과 기타의 번, 그리고 막부(幕府) 사이에 연합과 적대 그리고 배신의 반복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4개 번(藩)에서 시작한 메이지유신은 조슈(현 야마구치 현)와 사쓰마(현 가고시마 현)의 두 웅번(雄藩: 조슈와 사쓰마)이 연합한 삿초(사쓰마ㆍ조슈)동맹이 메이지유신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결국 두 웅번이 최종 승리자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조슈와 사쓰마의 두 번(藩)은 일본 전체에서 보면 작은 지방이지만 두 곳에서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일본 전체를 삼켰다. 그런데 2차대전까지 이들 두 번에서 일본의 수상, 육군과 해군대신, 육군과 해군대장, 장관, 검찰총장의 70%를 독식했다.

문제는, 이들 세력은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하는데 주력의 군사를 이룬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250년만에 부활하여 메이지유신의 주력이 되었고, 다시 조선을 정복하고(1910년) 36년간 지배를 했다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이들 두 번(藩)의 인물들은 일본의 권력을 독점하는데 그치지 않고 조선과 만주를 삼키고, 중국과 필리핀, 동남아를 침략하였다. 이후 이들이 세운 제국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다.

▲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가져온 결과. 조슈와 사쓰마의 2개 번(藩)은 근대 일본제국을 세웠는데, 이들 메이지유신 세력은 곧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과 동남아의 침공으로 치달았다. ⓒ 『오사카의 여인』
▲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가져온 결과. 조슈와 사쓰마의 2개 번(藩)은 근대 일본제국을 세웠는데, 이들 메이지유신 세력은 곧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과 동남아의 침공으로 치달았다. ⓒ 『오사카의 여인』

- 메이지유신의 실상
일반적으로 메이지유신(1868년)은 19세기말에 일본의 근대국가와 서구화를 달성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메이지유신은 유신지사들의 영웅적인 활동으로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실제로 장구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니다.
수많은 번(藩), 그리고 중앙의 막부(幕府), 또 상급무사와 하급무사들의 갈등, 일본 내에서도 지리적으로 너무나 다른 환경, 중앙집권화하지 못하고 수천 년간 지속된 봉건사회, 여기에다 서양 여러 나라들의 개입(intervention)과 농간, 서구문명의 도입과 그것에 대한 강박감 등 어느 하나 정리된 것 없이 어지러운 환경이었다.

사가의 난(佐賀の︎乱 1874년)
시부렝의 난(神風連の︎乱 1876년)
아키즈키의 난(秋月の︎乱 1876년)
하기의 난(萩の︎乱 1876년)
서남전쟁(西南戦争 1877년)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과는 달리 메이지유신은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로 점철한 사건이다. 육전에 이어 대규모의 해전도 벌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내전은 서남전쟁(西南戰爭, 1877년)이다. 서남전쟁에서는 무려 25,000명이 전사했다
그런데 메이지유신(1868년)을 자세히 보면, 막부(무신정권)가 가졌던 통치권력이 메이지천황의 신정부에 넘어간 사건에 불과하며 일본의 근대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진전쟁(戊辰戰爭, 1868~1869)이 종결되어 전일본이 신정부의 지배지로 되었지만 실제로는 막부시대(무신정권)와 똑같이 그대로 번주(藩主, 다이묘: 영주)들의 통치하에 있었다.


- 히데요시의 부활: 고시치노키리(五七の︎桐)
그런데 메이지유신이 성공하자마자 이들 유신의 주도세력들은 옛날 자신들의 주군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위상을 복원하기위해 토요쿠니(豊國)신사를 교토,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등 전국에 일시적으로 세웠다
즉 토요쿠니(豊國)신사의 건립은 메이지(明治) 정부가 에도막부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성립된 정권이라는 점에서, 그 주도세력이 지향하는 방향과 정신적인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활이자 임진왜란의 재현이다.
현 일본지배세력은 자신들이 토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히데요시 가문의 문장(紋章)인 고시치노키리(五七の︎桐)가 현재 내각총리대신의 문장으로 사용되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또 같은 문장이 조선총독부에서도 사용되었다.

▲ 일본을 지배하는 극우파가 배후인 일본 자민당을 이끄는 총리대신의 수상관저의 문양. 오동나무 잎새와 가지다. 현 일본 지배세력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세력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 『오사카의 여인』
▲ 일본을 지배하는 극우파가 배후인 일본 자민당을 이끄는 총리대신의 수상관저의 문양. 오동나무 잎새와 가지다. 현 일본 지배세력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세력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 『오사카의 여인』

또한 2020년 5월 19일에 아베 정부에서 방위대신(防衛大臣, 국방부장관)을 했던 고노 다로(河野太郞)의 집무실에 한반도와 만주 지도가 걸려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 왜 일본 국방부장관이 일본 지도가 아닌 한반도와 만주 지도를 걸어놓았을까? 자신들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손이며 따라서 자신들의 고토(故土, 옛 영토)인 한반도를 언제든지 다시 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런 마음을 먹고 있는 자들과 어떻게 우방으로 지낼 수가 있는가? 일본은 절대로 대한민국의 우방국가가 될 수 없다.

▲ 2020년 05월 19일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방위상이 트위터를 통해 공개한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과 전화 회담을 하는 사진 속 벽면에 한반도 지도가 걸려 있다. ⓒ 고노 다로 방위상 트위터 캡처
▲ 2020년 05월 19일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방위상이 트위터를 통해 공개한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과 전화 회담을 하는 사진 속 벽면에 한반도 지도가 걸려 있다. ⓒ 고노 다로 방위상 트위터 캡처

출처:
1.『오사카의 여인』, 곽 경, 2015
2.『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신동명ㆍ최상원ㆍ김영동, 2016
3.
https://v.daum.net/v/20200520161032808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