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사관으로 덧칠한 부산시사는 시민 자존심에 대못 박았다.

 

글: 유종성(지방분권포럼대표)

 

고대사를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도배한  부산시사

단군을 부정하고 우리 역사를 서기전 13세기로 폄하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중심으로 부산시 역사서술

서기 4세기까지 국가 없고 연맹 정치체 난립으로 기술

시민 역사단체의 공람의견 제출에도 시민 의견 무시

▲ 서기2024.02.02. 지방분권포럼 유종성 대표가 부산시 의회 앞에서 부산시사 편찬 중지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서기2024.02.02. 지방분권포럼 유종성 대표가 부산시 의회 앞에서 부산시사 편찬 중지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최근 호남 3개 지자체가 공동으로 발간하려던 '전라도천년사'가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논리를 그대로 추종한다는 역사시민단체의 지적을 받았다.

발간 주체인 전북, 전남, 광주광역시는 역사시민단체들과 도민의 비판 여론을 반영하여 ‘전라도천년사’ 배포를 무기한 연기하고, 사업을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부산시의 ‘부산시사(釜山市史)’도 원고를 시민들이 열람해 본 결과 ‘전라도천년사’ 못지않게 너무나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에 시민들은 공람의견 기간에 의견서를 제출하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내부 검토 결과 문제가 없으니 3월 중 발간을 강행하겠다는 전언이다.

시민 대다수가 동의할 수 없다고 하는 데도 아무런 해명과 설득, 의견 반영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존 통설만을 운운하며 출간을 밀어붙이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람 의견 절차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사(市史)’ 원고에 실려있는 내용들이 설득력이 있었다면 반발하는 시민들은 없었을 것이다. 부산시사 편찬위 측에선 단순히 부산시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기에 한국사 전반의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산의 역사가 곧 한국사를 구성하는 개체이고, 관찬 사서인 ‘시사’이기에 글자 하나도 결코 가벼이 서술될 문제가 아니다.

잘못 해석되고 서술된 기록이 세월이 흐를수록 살에 살을 덧붙이며 자가 발전하여 통설과 정설의 위치를 점하는 것을 보아온 터인지라 더욱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시사’를 편찬하는 목적은 단순히 학자들의 연구성과물을 논문으로 모아 보관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개된 시사 원고는 사실상 논문 모음집에 불과하다. 필체가 딱딱하여 독자의 인내를 요하고 역사의 사전 기초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시사 원고에 문제점을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1. 특정 지역의 ‘시사’라 하더라도 민족 고대사의 큰 흐름을 개괄적으로 서술한 다음에 부산시의 역사를 규명해 나가야 하나 이러한 서술이 빠져 있다.

2. 시사 원고에는 현행 국사교과서 내용보다 더 나빠져서 청동기 시작연대를 하향 조절하여 기원전 13세기경으로 내려 잡았으며 우리 민족의 시원문화인 홍산문명은 고사하고, 단군의 고조선마저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마치 한국사의 기원이 연나라 출신 위만으로부터 시작된 것인 듯 기술하고 있으며, 그 위치도 낙랑군과 함께 평양 일대로 전제하여 논을 구성함으로 마치 한국의 역사시대는 일본보다 짧았고 한국사는 중국인들에 의한 500년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 민족의 시조는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가지도록 서술되어 있다.

3. 사료에도 나오지 않는 낙랑군의 영향력을 과장하여 우리의 고대 정치체는 철저하게 낙랑군의 영향 아래 발전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4. 서기 44년 낙랑군에 귀부하는 소마시의 염사읍을 갑자기 ‘경남 창원’으로 비정하여 중국 세력이 500년 동안 한반도 남부까지 점유했다는 인식을 두도록 유도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보다 한술 더 떠 한국사의 공간을 축소하고 있다. 염사읍을 민족사학계는 “요동반도 남단”으로, 이병도는 “황해도 서흥” 부근으로, 북한의 리지린은 “평양 일대”로 비정했다. 언제부터 염사읍의 위치가 “경남 창원” 일대로 정해져 통설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지 시사 편찬위 측은 해명해야 한다.

5. <삼국지>에는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김해)까지 연안항로로 7천여 리를 간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거리 수치상 부합되지 않는 황해도에 위치시켜 놓고 논을 구성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의 공손강이 황무지에 대방군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황해도는 진국-삼한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황무지가 아니라 곡창지대이기에 상식을 가진 시민은 이해하기 어렵다.

6. <위략>이라는 사서에는 위만조선의 재상 역계경이 무리 2천여 호를 이끌고 “동쪽 진국(辰國)”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시사 원고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벼이 ‘동쪽’을 ‘남쪽’으로 변경하고 있다. “대방의 남쪽”이라는 방위는 그대로 취신하면서 “동쪽 진국”은 무엇 때문에 ‘남쪽’으로 변경하여 서술하는지 합리적인 이해가 어렵다.

7. <삼국지>와 <후한서>는 진국-삼한의 면적이 ‘방4천리(方四千里)’라고 적시하고 있으나 시사 원고에는 천리도 안되는 한강 이남에만 삼한을 위치시켜 놓고 논리를 구성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8. <삼국지>와 <후한서>는 진국, 진왕이라는 실체를 통해 삼한제국(三韓諸國) 전체를 통할하는 국가권력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신채호는 ‘삼조선-전후삼한’으로, 윤내현(前단국대 교수)은 ‘거수국제’로, 서의식(前서울대 교수)은 ‘이중용립구조의 진국체제’로 설명했다.

그러나 시사 원고에서는 이러한 1차 사료에 등장하는 광역의 정치력을 과소평가하기에 삼한제국을 하나로 통할하는 지방분권적 연방 체제인 “진국”과 “한”의 정치구조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

지방분권적 고대 국가체제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편제되는 상황을 계기성 있게 밝혀놓지 못함으로 마치 우리 역사의 발전 정도는 매우 늦었고, 기원후 4세기까지도 제대로 된 고대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원시공동체 수준의 소국들이 난립하거나 느슨한 연맹을 맺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9. <삼국사기>에 의하면 부산의 고대 정치체는 '거칠산국'이며, 1세기경 신라에 병합된다고 하나 삼국사기 초기 기사는 신뢰할 수 없다며, 기존의 "독로국-거제설"을 뒤엎어 “독로국-부산동래설”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말이 없는 고고학 유물을 가지고 독로국 소멸시기를 4세기, 5세기, 6세기설이 있다며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삼한제국을 하나로 묶어내는 정치력을 과소평가하고, 경상도 일대에 산재한 진한 6국이 연합하여 광역의 국가로 출발한 신라에 대한 이해가 없음으로 경주분지의 사로소국을 운운하며 억설로써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이해된다.

10. 광개토태왕릉비에 등장하는 임나가라 “종발성(從拔城)”을 연산동 ‘배산(盃山)’일대로 비정하나 종발성은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 "쫓아가(從) 성을 치니(拔城)"라는 동사로 풀어야 상황과 문맥이 매끄럽게 해석된다는 반론이 나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임나가라도 ‘대마도설’과 ‘큐슈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가야는 임나가 아니라는 반론이 힘을 얻고 있기에 가벼이 영남의 어느 한 곳을 특정하여 비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여전히 일본은 자국의 교과서와 개설서에 임나일본부설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사 편찬위 측은 다수가 아직 동의한 적도 없는 개인적인 견해와 이설(異說)을 여러 군데 기재해 놓고도 기존 통설대로 원고를 작성했다고 면피하고 있다.

시민이 동의하는 선학들의 학설은 통설이 아니라며 외면하는 이중적 행태를 취하고 있다.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학자들끼리 공유되는 학설이 통설이 되어선 안 된다. 학계의 기존 정설이라는 것도 매체의 발달로 1차 사료가 쉽게 공유되고 융합고고학의 발전에 힘입어 반론과 이설이 제기되면서 그 논거가 이미 무너져 일반 시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시사 원고 “고대편”을 읽고 있으면 역사에 대한 흥미가 반감되고 한국 역사의 시공간을 축소하려는 중국과 일본의 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아 화들짝 놀라게 된다. 부산시사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느냐고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전라도천년사'가 도민들의 여망대로 추진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식이 높은 호남 시민들과 호남의 도,시,군의 단체장들과 의회가 적극 나섰기에 가능했다.

부산시와 시의회의 역사의식과 역량이 호남분들보다 한 수 아래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시사 원고를 이대로 출간한다면 이것은 부산시와 시의회 그리고 시민들의 오명으로 남을 것이다.

시민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중국과 일본처럼 없는 역사를 창작해 달라는 것도 아니요. 한국사 전반과 부산의 역사를 과장하여 서술해 달라는 것도 아니다.

1차 사료에 근거하여 있는 그대로 서술해 달라는 것이다. 국익에 해로운 역사 자료를 남기는 우를 범치 말라는 것이다.

부산시와 시의회는 이제라도 적극 나서야 한다. 부산시사 관계자들이 나서서 시민들을 만나 해명해야 하고 시민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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