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식민사학을 척결하는 것이 단군을 역사로 살리는 길이다.

글: 민인홍(대종교 전리, 민주평통 자문위원)

 

단군 역사 부정세력은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들, 기독교계

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 고려사, 세종실록 등 역사로 기록

단군조선-부여족-고구려/백제, 옥저, 예맥-고려-조선으로 이어져

일인 학자들 단군부정, 이것을 이어받아 신화로 날조한 이기백

▲ 국조 단군 천진
▲ 국조 단군 천진

 

우리의 國祖는 '단군' 이다.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단군에 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신화처럼 기록되어 있다 보니 단군은 실존 인물이 아닌 神話, 다시 말하자면, 어느 시기에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특별히 이것을 강조하는 두 부류의 계층이 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식민사학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계’이다.

단군에 대한 현존 최고의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했는데 고와 동시였다(與高同時).

여기서 高는 중국의 성천자인 제요, 즉 堯임금을 말한다. 제왕운기와 고려사에서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한 시기를 당요 무진년이라 했는데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서기전(B.C.) 2333년이다. 우리나라 단기는 바로 이로부터 계산을 시작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단군고기> 를 인용하여, 단군과 부여,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내용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즉 단군조선을 부여가 계승하였고 다시 고구려도 단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계통적으로 서술해 놓았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보면 고구려 동명왕 설명에 '壇君之子' 라고 적혀있다. 고구려가 단군의 자손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단군조선의 실재 여부를 떠나 부여와 고구려는 자신들이 단군의 후예라는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 고려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고려사 백문보 열전에 단군이 동방의 시조임을 언급하고 있다.

제왕운기의 기록은 좀 더 구체적인데, 단군본기와 동명본기를 인용하여, 졸본부여의 비류국 송양도 자신을 단군의 후손이라 하였다고 하며 남북 옥저와 예맥도 단군의 후예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부여족 일파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승휴는 역년 계산을 단군조선 건국으로부터 기산을 하고 있다. 이는 단군을 국조로 인식한 것이다.

조선은 국호 자체를 고조선에서 따온 만큼 건국과 동시에 단군을 국조로 설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세종실록에는 오례에 단군제사 의식을 못 박아 놓고 있다. 이는 조선이 멸망하는 순종 때까지 이어졌다.

이로써 보면 단군조선 - 부여족 - 고구려/백제, 옥저, 예맥 - 고려 - 조선에 이르기까지 단군을 동방의 시조 또는 국조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자료 어디에도 단군의 기록을 신화로 기록한 것이 없다.

일연은 삼국유사 서문에서 "대저 성인이 예악과 인의로 나라를 세울 적에는 신기한 일이 있게 마련이다. 이는 중국의 시조들인 삼황오제의 탄생과 건국도 그러하거늘 우리 삼국의 시조들에 신이함이 있다고 해서 이를 어찌 괴이하다 한단 말인가? 내가 신이함을 이 책에 싣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고 적었다.

이는 일연이 삼국유사에 단군의 기록을 실을 때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여 수록하였을 뿐 신화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실제 삼국유사 제목도 '고조선 - 왕검조선' 이다. 한국에 전해오는 단군조선과 단군에 관한 기록 어디에도 이를 신화로 보고 있지 않다.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여 기록했다.

단군조선과 단군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로 변이된 때는 일제의 식민지 시기가 된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우리의 유구한 역사가 식민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이를 식민사관의 구미에 맞게 왜곡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894년 도쿄제국대학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단군사적(檀君史籍)은 불교 설화에 근거한 가공의 선담(仙譚)'이라 하였고, 게이오 의숙 출신의 나카미치요(那珂通世)는 1897년 사학잡지 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朝鮮古史) 논문 에서 "단군왕검은 불교승도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대사 지칭)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주장했다.

특히 일제 식민사관의 건설자 중 하나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1929년에 저술한 <단군考>에서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전설)로 치부하여 우리 민족의 국조인 단군을 부정했다. 이 같은 기류는 해방 후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두계 이병도에게 계승되었고 다시 이기백이 이어받았다.

잘 알다시피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은 한국사통론의 신기원을 이뤄 역사서로서는 가히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유명한 책이다. 당시 한국의 수험생 중에서 이 책을 안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그런데 이기백 교수가 쓴 저서 중에 <단군신화논집>이란 것이 있다.

이 교수는 '단군신화의 문제점'이라는 글에서 '오늘날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단군을 신화라 생각하는 쪽과 반대로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쪽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데,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상식이요 사실이라 믿는 쪽이 상식 밖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후로 모든 학교에서 학생이든 학자든 누구든 거의 모든 사람이 단군에 관한 건국 사실을 신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단군史話를 기록하고 있을 뿐인데 단군사화가 단군神話로 둔갑한 것이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여 단군을 국조로 받든 것을 대한민국의 학자와 정부가 이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화는 역사적 이야기지만 신화라는 말에는 사실이 아니다는 부정의 뜻이 내포된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고조선 단군기록을 부인하는 식민사학자들은 고려 충렬왕 때 사람인 일연이 이를 날조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로 삼국의 정사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단군조선 기록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의 역사만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단군을 기록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1년 기록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왕이 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거기로 옮기었다. 평양은 본시 仙人 왕검의 터이다. 혹은 왕검성이라 한다.".

이것은 고구려 당시에도 단군에 관한 인식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일연이 날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처럼 단군조선과 단군이 국조임은 오랜 세월 역사적으로 인식됐는데 소위 과학적이니 합리적이니 하는 것을 근대학문의 잣대라며 단군을 신화로 몰아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수천 년 그리 믿어왔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귀중한 가치요 조상의 유산이며 민족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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