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갑진년은 물가가 안정돼 서민 삶이 펴지길 바란다.

 

글: 오세훈(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 해를 시작하며 많은 일을 계획하고 다짐

지나고 보면 어느 것 온전히 이룬 것 없어

그래도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

청년과 노인. 자료: 경기신문
청년과 노인. 자료: 경기신문

<제야(除夜)의 종소리>

또 한 해의 끝입니다. 오직 떴다 지기를 삼백 예순 날 말없이 되풀이 하는 해가, 금년 한 해 동안 우리의 모든 발자취들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기록하였을 것만 같습니다. 

낮과 밤의 시간이 균등하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위안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질서란, 낮과 밤, 행불행, 영욕, 생노병사, 영고성쇠를 두루 포괄하는 거대한 운행(運行)일진데, 우리는 대부분 그 점을 자주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철부지 낙관주의자의 무리입니다. 

오래 전 어느 날, 밤새 벌 받는 꿈을 꾸면서, 울다가 잠에서 깬 적이 있습니다. 소년이 열 살 때였습니다.

몇 년에 한번씩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입시험장에 들어가고, 군대에 또 가야 한다는 입영통지서를 받는 악몽을 꾸곤 했습니다.

그 짙은 절망과 극도의 고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만 발생하는 비극입니다.

새해 첫날, 동해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밝고 건강하고 희망찬 삶을 간구하지만, 땅거미 지면서 다시 욕망으로 얼룩지는 밤이면, 덫에 걸린 쥐마냥 몸부림치곤 하던 기억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밤은 지금도 변함없이 그 구차합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인적이 드문 어두운 골목길로 자학과 자괴의 발자국을 찍으며 지나왔습니다.

그 쓸쓸한 여정에서 하루의 반이나마 밝고 따스한 빛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소중한 축복입니다. 이를 에너지 삼아 외롭고 두렵고 안타까운 밤을 견디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할 것입니다. 

밤은 고민 깊은 이들에게 이중고(二重苦)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의 불행은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물의 참회조차 임기응변이거나 위선임을 자각하고 자백하며 아파하는 영혼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의 삶을 일부나마 본받아 내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허기, 정욕, 천한 현시욕의 충족을 위하여 오만과 기만, 편벽과 타락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이 처절한 고백조차 참회보다는 교만에 가깝습니다. 반성보다는 반항입니다. 허세입니다. 허세는 위선을 낳고, 위선은 망상과 증오를 낳고, 증오는 눈을 멀게 합니다. 삶은 분명코 이렇게 찌든 곡선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밤이면 악령의 호령을 듣고 살아온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하루도 자괴와 꾸중을 피할 수 없는 밤은 이명과 환청이 거칠게 횡포를 부리는 시간입니다.

그 아프고 허망한 빈방에는 외면하고 싶은 허물들만 가득합니다. 피할 수 없는 징벌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나의 가족과 친구들 모두 다시 태어나 어제와는 질과 결이 사연으로 새해의 일상이 찰지게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제야(除夜)의 종소리는, 징벌의 시간(夜)을 거두려는(除) 소망의 외침일 겁니다. 하지만, 좋은 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찰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삶은 피할 수 없는 고해(苦海)입니다. 회오(悔悟)의 선잠에서 깨어나 제의(祭儀)에 참가하는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빈방의 창을 엽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우정과 호의를 귀히 여기고 고마워하며 잊지 않겠습니다.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새해 심신 두루 건강하시고 크고 작은 소망들 흡족히 이루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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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송년사는 30여년 전의 구문(舊文)입니다. 저는 서른 살 갓 넘었을 때, 미국의 앤 아버라는 아름다운 도시에 살았습니다. 그 동네는 눈 참 많이 내립니다. 그 어느 날, 서울의 한 매체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날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마음이어서 몇 년 전 올렸던 글을 조금 손봐서 다시 올립니다.

*나의 기준이지만, 2023년 한 해 동안 가장 아름답고 뭉클하고 품격이 높게 느껴졌던 한 시민의 선행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저 젊은이가 행복하고 든든하게 살기를 빕니다. 이 장면을 찍은 경기일보 기자를 초대하여 두부전골에 막걸리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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