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공을 위해 사를 완전히 버린 이 시대의 사표다.

글:  류돈하(역사 평론가)

노량해전 벌어진 곳은 현재 경남 남해

순천서 도주하는 소서행장 추격으로 시작

왜군 2만여명 수장,  왜선 2백여척 파괴

이순신,  왜군 유탄 맞고 전사, 진린 통곡

▲ 영화 노량 홍보지
▲ 영화 노량 홍보지

 

(이순신의 마지막: 부제=누가 감히 비교하는가!)

" 전투가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하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545.4.28~1598.11.19) 장군의 이 유언은 불멸로 남아 오늘날에도 널리 전해지고 있다.

이 유언의 출처는 징비록으로 이 유언을 남긴 곳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 벌어진 노량(현재의 경남 남해)이다.

1598년 11월 19일 시작된 노량해전은 일본국 태합 풍신수길의 사망 후 철군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전라도 순천에서부터 도망가는 소서행장을 추격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경상도 사천에서 소서행장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도진의홍(島津義弘:징비록에는 심안돈오로 표기됨.)의 군대는 거의 절반이 죽었다.

노량해전에서의 일본군 피해는 2만여명으로 격침된 일본군 전함은 200여척이다. 징비록 기록 중 이순신이 진격하여 대파했다는 문장은 참으로 통쾌하기까지 하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는 매우 처절했다. 특히 이순신이 지휘하는 동안 가장 많은 조선군이 몇백명 단위로 전사한 최초의 전투이고 보면 그 치열하고 처절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 수군 최고사령관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 장군 본인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니 말이다.

징비록에서 전하는 충무이공의 마지막 모습은 날아오는 화살과 돌들을 무릅쓰고 친히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적진에서 날아온 흐르는 유탄이 장군의 가슴이 관통하여 끝내 장군은 전술한 바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전사하였다. 장군의 유언대로 장군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그의 조카 이완이 지휘하며 도망가는 일본군에게 끈질긴 응징을 가하였다.

이완이 숙부를 대리하여 전투를 치루던 중에 명나라 도독 진린이 포위를 당하였으나 무사히 구출해 내었다.

전투가 끝난 후, 비로소 충무이공의 전사를 알게 된 명나라 도독 진린이 "나는 노야(충무이공)가 살아계시면서 나를 구하러 오신 것으로 알았는데 어찌 돌아가셨습니까?" 라고 하며 통곡하였다.

조선군, 명나라군 가릴 것 없이 온 군대가 통곡하여 그 통곡소리가 온바다를 우레와 같이 메워서 뒤흔들었다고 징비록은 전한다.

원래 명나라 구원병으로 온 진린은 자신의 나라가 대국임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여러 행패를 부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기고만장하던 그도 이순신의 인품과 진심 그리고 전략에 감복하게 된다.

그러한 인연에서인지 훗날 그의 손자 진영소가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에 들어와 정착하여 광동진씨 가문의 시작을 열었다. 광동진씨의 시조가 진린이다.

아! 우리 충무이공의 성씨는 이씨요, 휘는 순신이다. 본관은 덕수이며, 그 시조는 고려조 중랑장 이돈수이다. 5대조는 예문관 대제학 정정공 이변, 고조는 통례원 봉례 이효조, 증조는 병조참의 이거, 조부는 평시서 봉사 이백록, 부친은 창신교위 행참봉 이정이다.

32세로 무과에 급제한 충무이공은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기까지 세번의 파직과 두번의 백의종군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싸움에 임해서는 단한번도 패한적이 없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왜적을 무찌르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였다.

그리고 죽음 후에도 왜적을 크게 깨트렸다. 이는 죽은 후에도 사마의를 무찔렀다는 제갈량을 뛰어넘는 것이다. 충무이공은 진실로 민족의 성웅이다.

충무이공이 전사한 1598년 11월 19일은 장군의 지음(知音)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북인의 모함으로 결국 영의정 직에서 파직당하던 날이었다. 서애 류성룡은 자신의 저서 징비록에 이순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 통제사 이순신 공은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의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그보다 먼저 죽었는데, 이순신은 그들의 자손까지 거두어 자기 자식처럼 아껴 길렀으며, 조카들을 모두 혼인시킨 뒤에야 자기 자식들의 혼례를 올렸다.

그는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 중 한 가지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통제사 이순신은 군중에서 갑옷을 벗는 일이 결코 없었다. -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