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은 음이 비슷하다고 실제 역사 지명으로 못 박았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전라도천년사, 임나일본부설 지명으로 전라도 도배

일본서기 지명과 한국 지명이 비슷하다는 것이 근거

일본열도에는 일본서기 지명과 똑같은 이름이 나와

▲일본에서 만든 지도. 왼쪽 지도를 보면 전라남도가 온통 임나일본부 지역으로 그려져 있다.오른쪽 지도를 보면 임나가 전라북도까지 점점 확대되었고, 남원은 기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일본에서 만든 지도. 왼쪽 지도를 보면 전라남도가 온통 임나일본부 지역으로 그려져 있다.오른쪽 지도를 보면 임나가 전라북도까지 점점 확대되었고, 남원은 기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전라도천년사>,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13)

<일본서기> '신공 49년' 기사에 나오는 7국과 침미다례 그리고 임나 4현 등 지명을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모두 한반도 남부에 비정하였습니다.

이번 <전라도천년사> 집필자들은 이마니시 류를 비롯하여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했던 아유카이 후사노신 그리고 스에마츠 야스카즈 등이 비정한 지명을 대부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공람의견서'에는 이에 대한 반박이 매우 치밀한 논리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우선 박덕규의 공람의견서 일부를 살펴보겠습니다.

"정리하면 369년인 근초고왕 24년에 백제는 가야 7국을 정벌하고 이어서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자, 주변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사 등의 읍이 스스로 항복해왔고, 왜와 함께 고사산에 올라 맹서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라도천년사>, 3권 20쪽)

"비자발(창녕), 남가라(김해), 안라(함안), 탁국(창원, 경산), 다라(합천), 탁순(창원, 대구), 가라(고령) 등의 가라 7국(<전라도천년사>, 3권 266쪽)"

"고증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음상사다. 음상사 이외의 뾰족한 방법이 없기에 달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 (<전라도천년사>, 3권 51쪽)"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을 한반도 남부에 비정할 때, 뚜렷한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음이 비슷한 '음상사'를 내세웠습니다.

예를 들면 스에마츠는 '탁순'이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화'와 비슷하다면서 '탁순'을 대구로 비정했습니다.

탁순과 달구화가 비슷한가요?

그런데 놀랍게도 <전라도천년사> 집필자는 '음상사 이외에 다른 뾰쪽한 방법이 없기에 달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습니다.

'음상사'를 내세워 지명을 비정하는 것이 억지스러우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니, 학문 연구를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박덕규나 박찬화는 많은 고증을 들어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은 한반도 남부에 비정할 수 없고, 오히려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은 일본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지로 위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일본에서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라', '가라', '남가라', '다라'라는 지명은 일본 열도에 있습니다.

일본 열도에는 음이 비슷한 '음상사'가 아니라 음이 똑같은 지명이 여럿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라'는 일본 사가현에만도 무수히 남아 있고, 일본열도에 수십 개가 있다고 합니다.

공람의견서에는 이 이외에도 여러 지명들에 대해 많은 고증을 통해 <전라도천년사>의 위치 비정이 일본 식민사학자들을 추종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야 유적'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되었던 '남원=기문', '장수=반파'의 경우도 고증을 들어 명쾌하게 반박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집필자들이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하여 오히려 '자신들이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서기>에서 잘못된 내용을 걷어내고 보니 야마토왜의 사적이 사실은 백제의 사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이른바 '야마토왜의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야마토왜가 정벌하여 백제에 주었다는 임나 4현을 백제가 정벌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니, 일본 식민사학을 극복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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